Bible Study/구약 성서

히엘의 무정

진실과열정 2010. 3. 25. 10:47

히엘의 무정

 

1.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은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해야 함을 뜻합니다. 성서의 본뜻을 조금만 비틀어 버리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창세기 3장에서 간교한(아룸) 뱀이 벌거벗은(아룸밈) 두 사람을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이(창 3:1-5), 어찌보면 말씀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이해, 다시 말해서, 아룸아룸밈이라는 히브리어의 언어유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약간 비틀어진' 해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2. 성서에는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벧엘을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베트엘' 대신에 보다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베트 하엘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히엘'과 '하엘리'가 비슷한 발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맥상 히엘의 이러한 행동은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베트 하엘리'라고 히엘과 비슷한 발음을 던져주면서, 한껏 들어놓았다가 곤두박질치는 모습으로 끝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첫 단어인 '베야마우' 즉 '그의 시대에'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이것은 아합의 악으로 가득한 통치의 시대를 정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히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합 시대의 전반적인 모습을, 비록 그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볼 때 '잘 나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역사가는 정복된 지역에서 반대로 가나안의 풍습(아래를 보십시오)에 정복되고 있는 모습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1

 

    두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두번째 줄의 약간은 모호한 표현입니다. "그의 장자 아비람으로 (성을) 세웠고, 그의 막내 세굽으로 문을 세우도록 하였다"라는 표현은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한글개역성서는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불의의 사고로 각각 아들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뉘앙스를 줍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다 더 자세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마지막 줄을 먼저 해석해야 합니다(아래를 보십시오).

 

    그 전에 일단 세번째로 주목할 부분을 봅시다. 마지막 줄에서 주목할 것은 여호수아가 '예언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키데바르 야웨 아쉐르 디베르 베야드 여호수아'라고 나온 구절에서, '디베르 베야드 (+ 사람)'의 표현이 예언자의 말을 특징짓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왕상 8:56), 아히야가(왕상 14:18), 엘리야가(왕상 17:16), 예레미야가(렘 37:2) 예언을 선포할 때, 바로 이러한 특정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수아가 (물론 여호수아서에서) 말했던 선포가 예언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여호수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수아 6장 26절은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6장의 위대한 사건을 종결짓는 구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때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 구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는 성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즉, 내러티브라는 문학적 특징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신문기사를 읽는 것처럼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2 소위 정복시대라고 할 수 있는 후기청동기 시대의 고고학를 살펴보면, 성서의 내러티브가 역사적인 가치가 없는 문학적 전승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3 여기에는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중심적인 대상입니다. 후기청동기 시대에 이 지역에는 거주현상이 거의 없었음을 학자들은 밝혀냈던 것입니다. 다르게 읽는 방법은 없을까요?

 

   본래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를 비평적으로 연구해보면 그것이 아시리아 원정 비문과 유사함을 알 수 있는데,4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이후(20절), 성안의 모든 생명체를 멸하고(21절),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전리품을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게 됩니다(24절). 그래서 많은 성서학자들은 라합과 관련된 본문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특별한 언급으로 봅니다(22-23, 25절). (일단 무엇보다도 수 2장은 맥락에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1:10-11을 보면, 백성의 유사를 명령해서 백성들을 준비시켜서 "삼 일 안에" 요단을 건널 것이라고 하며, 그것은 곧 3:2-3에 연결되면서, (여기에서는) "삼 일 후에" 유사들이 백성을 준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읽기만해도, 2장은, 곧 다시 말해서 '헤렘의 전쟁 중에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원리'에 대한 언급은 후대의 편집[25절의 '오늘날까지'를 그 증거로도 삼을 수 있겠습니다]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본래의 자료는 이러한 대규모의 파괴 이후, 여호수아가 저주의 맹세를 내린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26절). 더 나아가 본문은 여호수아의 명성이 널리 퍼진 것으로 말하면서(27절), 아시리아 원정 비문과 확실히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수 6:26은 분명히 '저주구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문은 신 27:15-26에서 나오는 12개의 저주구문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신명기의 저주구문은 저주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 27장은 앞뒤에 있는 신 26장과 28장과는 달리, 3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라는 이름이 5:1이후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E. 니콜슨이란 학자는, 신 27장이 흐름을 깨고 있으며, 오히려 이것은 수 8:30-5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 (물론, 수 8:30-5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제단을 세우고 법을 낭독하는 모습으로, 후대의 편집물입니다. 그러므로 앞선 수 6:26의 저주와는 동일선상에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여호수아라는 인물에 고대인물(모세)과 후대사건(열왕기서)이 모여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다룰 바는 아니지만) 여호수아가 신명기적 역사가의 중요한 역할모델로 이해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6

 

   여호수아는 무너진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게 된다면, 그 가문이 야웨 앞에서 멸절할 것이라고 저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도자가 무너뜨린 것은, 그 누구라도 다시 세우면 안된다는 정복자의 논리인 셈이지요. 어찌되었건, 본문은 이렇게 강력하게 여호수아의 저주를 단언하고 있습니다.

 

4. 다시 왕상 16:34로 가봅시다. 아합의 시대는 남유다 왕국의 서기관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분량에서 압도적이지요. 그러한 아합의 시대를 평가하는 것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통한 이방 종교의 유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34절 역시 그러한 전체적인 평가의 '또 하나의' 첨가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여호수아의 저주가 성취되었다는 것보다는, 그 이면의 '또 하나의' 현상을 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앞선 2번의 연구에서, 34절 중반절까지는 히엘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었거나, 혹은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성을 건축하려고 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신의 세계에 살고 있던 고대인들은, 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신의 자비를 얻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왕하 3:27을 보면 모압의 왕이 자신의 전세가 불리함을 보고,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왕상 16:34 구절에서 '인간번제'의 기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7 물론 인간번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지요.8 그러나 저는 아합의 시대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였던 종교풍습이 34절에도 연속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번제'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즉, "그 시대에는 여전히 인간번제를 드리면서까지 무너진 성을 쌓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는) 여호수아의 저주구문이 성취된 것일 뿐이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본래 여호수아는 저주구문으로 말했던 것을, 히엘은 '그럼에도불구하고'의 구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9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우리들은 조금 비뚤게 해석하면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서를 근거로 행동의 타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멸망 당한 민족의 논리라고 비웃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떨까요? 법을 근거로 그 법을 위반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조금 복잡하게 생각한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빈 체이니 교수의 주장을 따라서,) 여호수아라는 인물로 제시된 요시야 시대의 서기관들이, 역사적 사건의 기억을, 요시야의 개혁으로 인해서, 인간번제의 당연한(?) 가나안의 풍습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기원 신화를 등에 업고, '우리는 그러한 야만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편집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하던 서기관들의 충격이 (혹은 모압 왕의 아들을 몰렉에게 번제로 드린 것에서처럼) 시대의 패역을 고발하기 위한 선전문구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여호수아의 저주가 성취된 것으로 포장되면서, 여호수아 곧 요시야의 능력을 고취시키는 효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시야는 곧 예언자인 셈이지요. (혹은 그의 배경에 예언자 그룹이 있거나요.)

 

 

 

 

 

 

 

 

 

 

 22:251. 열왕기상

  1. Iain W. Provan, 1 and 2 Kings (1995), 131; Marvin A. Sweeney, 1 & 2 Kings (OTL; 2007), 206. [본문으로]
  2. 참조. Niels Peter Lemche, The Old Testament between Theology and History (WJK: 2008), 35. [본문으로]
  3. Amihai Mazar, Archa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 (NewYork: Doubleday, 1992), 330. [본문으로]
  4. John van Seters, 1990:3-6; 1983: 324-31을 보면, 그는 여호수아서를 1-12장의 구성비평을 진행하고 있는데, (1) 기본형식에 (2) 신명기적 역사가, 그리고 (3) 제사장 편집기사가 더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루고 있는, 여리고성의 붕궤 역시 (1)에 속하여 있는데, 그는 (1) 기본형식이 아시리아 원정 비문과 유사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5. E. 니콜슨, [신명기와 전승], 46. [본문으로]
  6. 그 중요한 인물로, 요시야를 0순위로 잡을 수 있는데, 그러한 해석을 타당하게 제시한 것으로, Marvin L. Chaney, [농경사회 시각으로 본 고대 이스라엘]을 참고하면 좋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7. T.L. Thompson 1974: 169; J.J. Collins 2004: 268; W.G. Dever 2005:217. [본문으로]
  8. Volkmar Fritz, 1 & 2 King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3), 180. [본문으로]
  9. Michael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1985), 50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