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진실과열정 2010. 1. 30. 10:46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박상준 역 (황금가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을 법한 상황 설정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신에 나오는 백과사전에 따르면, 먼저 좌뇌가 정보를 취득하고 그것이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라고 평가되면 우뇌로 전달이 되어 논리 이상의 차원으로 넘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류가 더 이상 자손을 출산하지 못하게 된다면? 영화 ‘children of man’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환경파괴 등의 원인으로 자연적으로는 출산하지 못할 것이라는 잠재적인 공포를 확대한 것이라고 하겠다. 혹은 더 이상 인류에게 문화가 허락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소각되어버리는 명화와 도서들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금은 과장된 상황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화씨 451은 후자에 가까운 책이다. 1953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니, 아마도 반공시대 혹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사상의 일체화가 강조되었던, 매카시즘의 역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퀼리브리엄이 화씨 451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읽으니 정치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 아마도 이때쯤 흑백을 벗어나 실재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친척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유일한 인간관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려고 했나보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움직임(운동, movement)을 요구하는 메시지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조금 가까운 미래엔,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정복된 사람들의 미래엔, 소방수(fireman)가 필요 없게 된다. 단열재로 완전 무장된 집에는 완벽한 방화시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소방수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대신 사람들이 사고하게 만드는 책에 대해서는 금지령이 내려지고, 책을 소유하고 있는 집을 발견하게 된다면, 방화수(fireman!)가 ‘정의의 불’을 합법적으로 내릴 수 있게 된다.

 

주인공(몬테그montag)이 바로 방화수이다. 그런데 고민하는 방화수로 등장한다. 자신이 읽어보지도 않은 책들을, 단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온 집을 마음껏 태워버리고, 그 웃음 가득한 그을음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는 삶이 그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돌아가는 일’에 의심을 품고 과거를 돌이키는 소녀와 만나게 된다. 그도 역시 문제를 품곤 했다. 책과 함께 온 집을 태우는 과정에서, 남몰래 한 권씩 책을 훔쳤던 것이다. 과연 책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것은 텔레비전으로 대변되는 미래상의 모습과는 반대의 양상일 것임에 분명하다. 몬테그의 주변인들은 미래의 참담함에 찌든 인생들이다. 그의 아내는 약물 중독자, TV 중독자일 뿐, 의미 있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몬태그는 새로운 선택을 하기로 한다. 책을 태우는 이 사회를 전복하자! 이제 쫓는 자에서 쫓기는 자로 바뀐 운명에 기대어, 그러한 선구자들과 함께(이 책은 인물구성을 되도록 단순하게 설정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에 젖어 있는 자[아내], 새로운 문화의 위험을 알지만 두 손 드는 자[서장], 새로운 문화를 변혁하는 자[소녀와 후반부에 나오는 도망자들]), 도시를 뒤로하고 자연을 선택하는 것을 저자는 선택하고 있다.

 

화씨 451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책이 탈 때의 온도라고 한다. 가장 진보된 물체로서, 도망자를 추적하는 사냥개의 이미지가 영화 ‘레드 플레닛’에서 오버랩된다. 역시 상상력은 과거의 그 무엇으로 인해서 조절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의 무한한 상상력의 선배들에게 멋진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