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영화] 시네마 인 커피

knowing - 인류의 근간에 있는 종교성에 대한 위험한 접근

진실과열정 2009. 7. 20. 11:46

새천년을 준비하던 Y2K 즈음에 대박을 쳤던 영화로, "아마겟돈"을 먼저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완전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미를 둘 수 있다고 한다면,

인류가 또 맞이해야만 하는 일종의 전환점(시간이란 우리 인류에게만, Y2K임에도 불구하고!)으로써, 어떻게 새천년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호소력있는 목소리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문화적 주류는, 불안한 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소중한 희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는 그래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의 '미래형' 영화는 Y2K의 희망의 메시지를, 보다 급진적인 경고로 다시 들려준다.

인류가 가시적으로 종말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종말의 상태에 접해 있다고 시대는 상정하는 것 같다.

'눈먼자들의 도시', '나는 전설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 '해프닝'과 같은 영화들과, '로드'와 같은 (곧 영화로 선보일) 문학은 하나같이 어두운 미래를 그려내면서, 희망이란 빛을 비춰주기를 최소한 수준으로 줄이고 있다. 사실, 종말은 이제 (영화의 세계에 따르자면) 사람들의 마음에 실재로 정당화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종말이 인류에게 필요한 과정처럼 느껴지도록 여겨질 정도이다. "이런 짜증 나는 세상, 차라리 한 번 뒤집어져야 되는 것 아냐!" (그러면서도 내가 생존의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Knowing이란 영화는 이런 부류에 속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엔 일종의 종교적 호교론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우리말로 '앎'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의 핵심은 바로 성서를 일종의 '예견의 코드'로 접근하는데 근간을 둔다. 마치 한 때, '바이블 코드'가 빅히트를 쳤던 것을, 교묘하게 영화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영화는 숫자의 코드를 역사적 참극의 현장과 일치시키고,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인류의 종말로 완성한다. 그러면서 성서의 모티프들을 가져다가 쓴다. 그러니까 (예언서) 에스겔과 (묵시록) 예언서의 내용을, "문자그대로!"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4명의 천사, 불의 심판, 들려 올라감(휴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 (마지막으로 실소를 금치 못할 것으로) '새로운' 선악을 알게하는/영원한 생명의 나무의 등장이 그것이다.

 

 

 

 

 

 

영화는 과학과 신앙의 세계에서, 이젠 과학으로 볼장 다 본 사람들이 체념하며 '과학, 뭐 별거 없네'할 정도로 과학에 푹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소개한다. 그래서 호교적으로 보일 수 있다. 새로운 구원의 문이 열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관객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설득적이라고 해도, 관객은 불편하다.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죽어야만 하는 것에 관객들은 불편해 한다. 선택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수동성에 관객은 불편해 한다. 자신이 걸어왔던 모든 것들을 한낮 휴지조각으로 치부하려는 거만함에 관객들은 불편해 한다. 나도, 비록 새로운 결말을 보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올라가는 자막을 보며 내내 불편해 했다.

 

우선, 성서는 코드가 아니다. 그리고 성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때려 맞출 수 있는 '족보집'이 아니다. 성서는 당시에 과거를 반성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쓴 고백이다. 그들의 세계관을 먼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언서와 묵시록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또 하나의 '청개구리'가 된다(엄마의 유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비가 오면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청개구리말이다). 예수의 비유는 비유로 올바르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며, 휴거라고 알려진 '파루시아' 역시 당시 개념은 승리한 장군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서 성 밖으로 나가서 모셔 들이는 행동을 의미한다. (뭐, 사실 이런 내용으로 반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영화를 영화로 읽는데 실패한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영화는 종교가 어떻게 사회에 기능해야 하는지 또 하나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 같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사람들의 한쪽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수천년 인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성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