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구약 성서

[연구논문] 폐위된 태후 마아가(왕상 15:13)는 과연 누구인가?

진실과열정 2009. 5. 18. 17:31

발표자: 양지웅(침례신학대학교, Ph.D., 구약학 3학기)

 

 


본글은 구약역사세미나(2009.1학기; 담당교수:우택주)에서 연구된 글입니다.

또한 구약학회 박사과정 콜로퀴엄에서 발표된 연구입니다(2009.5.22).

이 연구는 실험적인 것이며, 연구 자체의 논쟁 이외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음을 알립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이 '문학'보다 강력해보이고,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역사'에 접근하는 것 같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은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비평을 기다립니다. 


 

 

 


 

폐위된 태후 마아가(왕상 15:13)는 과연 누구인가?



1. 역사의식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런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1


      몇 년 전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을 이끌었던 소위 ‘인식과 재인식’의 화두는 대중의 주파수 대역을 벗어난 지 오래가 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아직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양쪽 편은 자신들의 역사 ‘인식/재인식’을 갈고 닦으며 다시 돌아올 새로운 논쟁을 준비 중이다.2 그들이 이렇게 열띤 논의를 펼치는 까닭은, 역사라는 것이 단지 하나의 거대한 담론으로써 학자들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대상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역사라는 것이 하나의 엄청난 동력을 가진 것으로써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실제적인 세력으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재인식’할 것인지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고심을 학문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량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식과 재인식’의 논쟁에서 ‘재인식’의 편이 심하게 공격을 받았던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그들이 역사라는 학문 분야에 상대적으로 상당히 비전문가였다는 점을 다시 기억한다면,3 역사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호된 질책과 비판이 기다리고 있는 영역임을 명심해야만 하겠다.

      누구나 역사를 언급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역사학을 다룰 수 없다. 역사학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는 E.H. 카(Carr)가 “역사를 신학이나 문학으로 만들지 말라”4는 지적은, 또한 역사라는 신기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중요한 진술이라고 하겠다: “오늘날까지도 고대사나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매력의 하나는, 그것들이 손닿는 범위 안에서 모든 사실을 처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5 이러한 진술은 특별히 성서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성서 연구의 증표로 주어지는 다양한 ‘인증카드’들(M.Div., Th.M., Ph.D.)로는 역사학의 관문을 무사통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의 ‘역사’로 볼 때, 오랜 전통의 문학적 접근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하면서 생겨난 역사적 접근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여과망을 통과하기에 그 기반이 상당히 미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6 다행스럽게도 이제 성서학은 ‘증거본문(proof-text)’이나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수준에서 벗어나서, 성서 본문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러한 이해는 교단신학과 전통 혹은 ‘문자주의’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므로, 상당한 진통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요약하면, 문제는 문학적 텍스트를 역사적 텍스트로 인식하려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이었다.7 때로는 해석이 이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일종의 학문적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였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특별히 성서학에서 오랜 논쟁의 양쪽 편인 소위 ‘극대주의자(maximalist)’와 ‘극소주의자(minimalist)’ 사이의 뜨거운 대결은 앞선 ‘인식/재인식’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전혀 뒤지지 않는다.9 이러한 학문적 진통은 장차 성서학이 역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귀한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근 ‘극소주의자’들의 혁혁한 진출은 새로운 분위기의 전환을 일으키고 있다.10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들만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11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띄고 있는지, J. 맥스웰 밀러(J. Maxwell Miller)와 존 H. 헤이에스(John H. Hayes)는 20년 만에 자신의 책을 개정하면서 “역사에 대한 논의의 무게 중심이 상당히 왼쪽으로 기울어져있다”고 진술하였다.12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검증하는 일은 별개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연구자는 ‘극소주의자’의 접근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한다. 이는 성서본문만을 유일하며 절대적인 권위의 자료로 취급하지 않고, 고고학과 사회학과 같은 학문분야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말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연구 결과가 성서 이해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대상은 소위 ‘신명기적 역사서’(이후로 DH)의 핵심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열왕기서이다(왕상 15:13). 이미 ‘역사’라는 그물에 걸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그물을 해체하고 평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역사학자인 피터 버크(Peter Burke)의 말과 같이, 포스트모던의 눈에 볼 때, 과거의 기록물은 “정당화를 위해 사용된 과거 이야기”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13 그들의 해석을 기반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공헌하려는 바가 논의의 핵심이며, 학문적 성격을 벗어난 신앙고백적인 문제는 논외로 두겠다. 한편, 연구본문은 MT를 대상으로 하며,14 역대기의 기록(대하 13-16장)은 ‘방대하고 자세한 내용’이 있음에도,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이번 논의에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겠다.15



2. 폐위된 태후 마아가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왕상 15:13)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태후 마아가의 폐위 사건을 정리하고 평가하도록 하겠다. 불행히도 이 사건에 대한 전모는 미궁에 빠져있는 상태인데, 아마도 열왕기의 기록자(혹은 편집자)에게 큰 주목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후에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왕상 15:16-22), 아사 왕의 성읍 건축의 배경이 주된 관심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불충분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주석가들과 학자들은 저마다 깊이 있는 해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성서의 내러티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왕상 15:1-24): 르호보암은 아비살롬의 딸인 마아가와 혼인을 하고 그 아들인 아비얌이 뒤를 이어 삼 년간 유다를 다스리게 된다. 야웨 앞에 온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 다윗의 정직한 삶 덕분에 아비얌은 부친의 싸움을 계속할 뿐, 별다른 사건 없이 짧은 통치기간을 보내고 왕권을 아들 아사에게 넘긴다. 그도 역시 아비살롬의 딸인 마아가의 아들이었다. 사십일 년이라는 상당히 긴 통치기간 중에 아사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기까지 하였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니, 라마를 건축함으로써 유다를 견제하려는 바아사의 계략에 아람의 원조를 이끌어 들임으로써 라마 건축을 중단시키고 오히려 게바와 미스바에 자신들의 성읍을 건설하게 하였다. 아사의 긴 통치의 요약은 그가 권세가 있었으며 성읍을 건축했으며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열왕기서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16 역대기서는 그 방대한 정보에도 불구하고(대하 13-16장), 우리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우선 아비얌(~Y"ßbia])의 이름을 아비야(hY"ßbia])로 바꾸면서 고대 가나안의 신명을 버리고, 신앙의 순수성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17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대기 자체의 일관성에 부합되지도 못하며,18 혹은 단순한 서기관의 실수로 여겨지기도 한다.19 이러한 이름의 변화는 아비얌의 어머니에게도 나타난다.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hk'Þ[]m;)”가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 미가야(Why"ïk'ymi)”로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두 명의 왕이 다스렸던 것일까? 또한, 왕상 15:4이 말하고 있는 “등불”의 약속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여호람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왕하 8:19//대하 21:7), 여기에서는 종교적 순결성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법한 실제적인 등불로 이해되면서(대하 13:11), 신명기적 역사가(이후 Dtr)의 난데없는 삽입(왕상 15:4-5)에 자못 당황스러웠던 점을 암시하게 해준다. 동시에 두 명의 왕이 다스리는 문제를 다시는 만들지 않기 위하여, 역대기는 아사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대하 14:1).20 오히려 전쟁의 승리와 과감한 종교개혁으로 도배할 뿐이다. 그러나 왕상 15:13의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든 어머니 마아가의 태후 자리를 폐위한 사건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대하 15:16), 그 치밀함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벤하닷이 공격한 이스라엘 성읍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왕상 15:20; 대하 16:4).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하면, 사실 역대기의 목적이 열왕기의 주석에 있지 않고 포로 후기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에 있는바,21 역대기의 설명은 우리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해야겠다.

      다시 열왕기서로 돌아와 보면, 이 본문이 열왕기서에서 “가장 흥미가 적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22 해명해야 될 문제들이 여럿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주석가들의 몫이며, 우리는 태후 마아가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부분들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역대기서가 해결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주석가들은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선,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열왕기서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면, 과거엔 ‘역사기록물(historiographic document)’로 접근했었지만,23 최근에 들어와서 ‘내러티브적 역사(narrative history)’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4 이 말은 열왕기서를 통해서 정확한 역사적인 재구성을 하는 작업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자신들의 기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재구성을 해내고 있다.25

      첫째로, 왕상 15:2,10의 마아가와 아비얌/아사의 관계를 살펴보자. 문자적으로 읽으면 아비얌과 아사가 형제가 되겠지만, 주석가들은 대체적으로 아사를 아비얌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아비얌의 통치가 너무 짧았지만 그 어머니의 직위가 너무 강력한 것이어서 아사의 시대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거나,26 어머니라는 단어의 용례 자체를 확장시킨다.27 혹은 그술과의 오랜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아람을 선택하려는 아사의 국제정치사적 선택으로 재구성하거나,28 혹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사를 아비얌과 마아가의 근친상간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29 이렇게 볼 때, 유보하는 입장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라고 보인다.30 왜 주석가들은 아비얌에 대해서 DH가 극히 예외적으로 언급이 적다는 점을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은 것일까?31 또한 아비얌과 아사에게만 유독 즉위시의 나이가 기록되어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왜 질문하지 않은 것일까?

      두 번째로는 13절의 “혐오스러운(tc,l,Þp.mi) 아세라 상”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MT가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tc,l,Þp.mi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일관되게 그 어원(צלפּ, 전율하다)을 따라서 번역하고 있다(욥 21:6; 시 55:6; 사 21:4; 겔 7:18): abominable,32 detestable,33 repulsive,34 horrible,35 horrid,36 monstrous.37 다른 번역본들 역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abominable(NRSV, TNK), obscene(NJB, GNB), 혐오스러운(개정, 새번역), 음탕한(공동).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우상의 형태”38를 유추하거나 혹은 여신의 풍요로움을 암시하는 차원에서 ‘음란성’이 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가나안 사람들의 것이라고 민족적인 구별을 내리기까지 한다.39 이는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없겠다. 벌게이트 역이 ‘음경’으로 선택한 것보다 오히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왜 주석가들은 아세라 상이 “혐오스러운지”를 언어학적인 차원 말고는 달리 설명하려 하지 않은 것일까? 또한 과연 ‘누구에게’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묻지 않은 것일까? 혹은 왜 그것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믿어져야’ 되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17-22절의 벤하닷의 원군에 대한 주석가들의 설명을 살펴보자. 일단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다 빼앗긴” 상황에서(왕상 14:26) “남은 은금”을 원조자금으로 바친 것(왕상 15:18)에 대해서, 그리고 왜 ‘라마’를 버려두고 온 유다 백성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된 노동을 하게 만들어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40 20절 만큼은 입을 모아 갈릴리 북서쪽을 가리키며 고고학적인 정보를 내쏟고 있다.41 한편, (당연한 것이지만) “아벨벧마아가(hk'_[]m;-tyBe( lbeäa')와 긴네렛(tArên>Ki) 온 땅”이 대하 16:4에서는 “아벨마임(~yIm"+ lbeäa', 아벨의 우물)”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하고 있다.42 이러한 장소는 정확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연구에 의하면, 아벨(לבא)이 목초지를 지칭하며, 이 단어가 가리키는 지역이 전반적으로 요단 동편(아벨 미스라임[창 50:11]; 아벨 싯딤[민 33:49]; 아벨 므홀라[삿 7:22]; 아벨 그라밈[삿 11:33])을 가리킨다는 점이 주장되고 있다.43 이러한 정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렇게 의문이 풀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연구서 역시 주석서 이상의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신명기사학파가 ... 각 왕들을 인물 자체 또는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따라 평가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라고 말하면서,44 정보부재의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게오르크 포오러(Georg Fohrer)는 아비얌과 아사를 형제로 이해하고 있으며, 마아가의 폐위를 야웨에게 여성적인 신성을 덧붙이려는 종교적인 혼합주의에 대한 고대 신앙의 복원운동으로 설명하고 있다.45 이러한 이해는 존 브라이트(John Bright)에게서 더욱 확장되는데, 그는 이 시기에 “성창과 동성애를 포함한 이교의식들이 자유롭게 성행하였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46 밀러와 헤이에스는 상당 부분을 아비얌과 아사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쏟아 붓고 있을 뿐이다.47

      지금까지의 설명들을 종합해보면, 성서본문 상의 이해가 명백하게 풀어지지 않고 있으며(아비얌과 아사의 관계), 전통적인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본문을 접근함으로써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마아가의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 본문에 고고학적인 증거를 주입하여 그 이상의 해석의 여지를 내리고 있지 않고 있음(아벨벧마아가)을 지적할 수 있겠다. 기존까지의 이해로 본다면, 태후 마아가의 폐위는 마빈 스위니(Marvin Sweeney)를 제외하면,48 그리 신선한 해석을 내리지 못한다고 하겠다. 중요한 점이라면 마아가의 폐위가 DH의 내러티브 안에서는 정치적인 면이 사라지고 종교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49 한편, J. 알베르토 소긴(J. Alberto Soggin)은 아사의 개혁에 Dtr의 표현이 지나치게 두드러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역사성을 의심하고 있다.50 소긴의 지적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하면 어떨까? 예를 들어, 아비얌과 아사의 관계를 역사성과 무관하게 이해하는 것이며, 마아가의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과 관련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며, 지리적인 정보(아벨벧마아가)를 적절한 상상력을 가지고 재해석하는 것을 어떨까? 이와 관련하여 백지상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극소주의자들의 접근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과연 다윗의 통일왕국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고대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가 성서가 규정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은 아닐까? 지리적인 언급은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3. 폐위된 태후 마아가는 누구인가?


우리의 관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상당히 새로운 목적을 겨냥한 새로운 유형의 만들어진 전통들을 구성하는 데

낡은 재료들을 이용하는 경우다.51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검토는 이스라엘의 기원에서 한동안 멈춰왔던 것이 사실이다.52 아마르나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팔레스타인에 출현했던 본토인들에 의한 고지대 개간의 역사가 이른바 ‘초기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다.53 물론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유한 민족적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민족적 소집단들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이다.54 이것은 지리적 조건55과 그로 말미암는 경제적 활동56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아직까지 그 출발점부터 여전히 논쟁 중에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의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57 변화의 출발은, 고대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농경사회라는 인식이다.58 철기 I시대에 고지대에서 출현했던 사람들은 그 수가 매우 적었고, 전적으로 자신들의 토양에서 배출되는 농작물에 의해서 자신들의 생존을 겨우 보장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북부 평야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서 인구밀도를 점차 높일 수 있었지만, 남부 지역의 메마른 토양은 쉽사리 세력형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북부에 정치적인 세력이 형성될 수 있었던 점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59

      성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통일왕국은 증명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60 성서 자체가 주장하는 일종의 자료들은 역사적인 문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무엘서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은 우가릿 문헌에서 기원한 스파르타의 군가로 보이며,61 열왕기서에 소개되는 “솔로몬의 행장”은 일종의 저작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62 결국 그들만의 주장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이름뿐인 자료를 근거로 그 존재의 희미한 형상만을 더듬을 수밖에 없던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통일왕국은, 고고학적인 손길이 다가갈 때 그 형체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입장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Israel Finkelstein)과 닐 애셔 실버먼(Neil Asher Silberman)이 일찍이 주장하는 바였는데,63 이들은 최근 저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에 대한 고고학적 재평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64 이들에 의하면, 다윗은 ‘아피루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산적으로, 블레셋에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가 셰숑크 I세의 (르호보암의 유다 왕국이 아닌!) 북부팔레스타인 원정을 계기로 세력을 확장하였다.65 그렇다 해도 다윗의 세력은 추장제를 넘지 않는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다윗이 세웠다고 하는 왕국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지점은 여호사밧이 오므리의 왕조에 종속되면서부터이고,66 그 왕국의 왕성한 시기는 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특별히 핑컬스타인은 고고학적인 증거를 내세우면서 8세기 이후야말로 남유다 왕국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67 이것은 이스라엘의 문헌기록의 역사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주장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68 물론 여전히 다윗 왕국에 대한 역사성을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의 연구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69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 역시 다윗 왕국의 것이라기보다는 북이스라엘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70 역사성은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주장된다고 하겠다. 단적인 예로, 왕상 4:7-19이 말하고 있는 솔로몬의 행정구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71 무리라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행정구역은 상당히 북쪽 지파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것이며,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리한 요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72 그러므로 앞서 질문했던 것과 같이 원천적인 사항을 물어야만 한다: 과연 다윗의 통일왕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통일왕국’의 이미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혁신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텔 단의 비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닐스 피터 렘케(Niels Peter Lemche)와 토마스 L. 톰슨(Thomas L. Thompson)은 위의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해석의 열쇠를 소개하였다.73 우선 렘케는 고고학적인 유물 자료 가운데 오므리와 아합이 관련된 것은 상당히 많은 반면에,74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10세기 유다 지역 연구와 관련하여,75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정보는 성서가 전부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출발로 삼아서 “위대한 팔레스타인의 왕국”이라는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성서의 전승이 사실 오므리 왕국에서 유래된 전승이라는 점을 주장한다.76 다시 말해서 오므리와 아합의 이미지는 다윗과 솔로몬의 이미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파격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앞선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설명이 된다. 연구자는 렘케의 주장을 확대하여, 르호보암과 아비얌과 아사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나답과 바아사를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남유다의 실질적인 왕국으로서의 출발은 여호사밧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77 이 말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시작했다는 셈인데, 사실 이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왕국시대의 정치경제 상황에 적합한 구조이기도 하다.78 고고학적인 자료는 북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손꼽히는 강국임을 증명해준다.79 속국은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강대국을 삼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 ⊃ 페니키아 ⊃ 북이스라엘 ⊃ 남유다’와 같이 비교적 단순하게 제시된 먹이사슬은 사실, 정치․경제․종교를 아우르는 일종의 ‘세계관의 복종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80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렘케가 주장하였던 바와 같이,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지나친 주장일 수 있겠지만, 연구자는 이러한 작업을 했던 (요시야 시대의) 기록자들이 이 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율법책을 만들지 않았는가!(왕하 22:8; 렘 8:8)81 따라서, 요시야 시대의 ‘역사 만들기’에 대하여 권위 있는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시도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82 이렇게 볼 때, 이름을 정교하게 고치는 것은 서기관들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자료비평적으로 오경을 접근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이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을 매끄럽게 조화시켰던 서기관들의 솜씨를 볼 때, 이름을 바꾸는 일은 그들의 주종목이었음을 추측케 한다(창 30:23-24).83

        오므리와 아합에게서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를 만들어냈던84 (요시야 시대의) 서기관들은 여로보암에게서 시작된 북이스라엘 왕국을 따라잡기 위해서 상상의 인물을 만들게 된다. 즉, 여호사밧 이전에 존재했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²b.r"y")과 나답(bd"än") 그리고 바아사(av'Û[.B;)라는 인물과 맞먹을 만한 남유다의 왕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들은 바로 르호보암(~['²b.x;r>)과 아비얌(~Y"bia]) 그리고 아사(as'Þa')이다. 그 실제적인 기법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이며, 주변 정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아비얌과 아사에게만 유독 즉위시의 나이가 언급되지 않았던 점은 서기관들이 보여준 최후의 양심은 아니었을까? 또한, 이러한 가상인물에 대한 무마책으로 역대기는 아비얌을 아비야(hY"ßbia])로 수정하거나, 아사(as'Þa')를 아람어(’asyā’)인 의사로 이해하고(대하 16:12)85 일종의 미드라쉬를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기관들은 이 들 왕들 모두에게 북이스라엘과 “일생 동안 전쟁이 있을” 만큼 강력한 모습을 부여하는데 있어서만큼은 성공적이었다(14:30; 15:7; 15:16). 사실 아비얌은 나답을 모델로 잡았으나(짧은 통치 년과 그에 대한 평가는 유사하다), 그가 모반을 당했다는 점 때문에 아마도 병들어 죽은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hY"ßbia])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왕상 14:1). 이렇게 볼 때, 어쩌면 바아사가 행했던 모반은 아사가 해했던 ‘다른’ 모반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사실, 이러한 문학적 집단들은 결국 왕상 13장의 요시야라는 (장차 등장할) 정체불명의 인물을 뒷받침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비얌과 아사의 허구성과 요시야와의 관계는 왕상 15:16-22의 내러티브 단락에서 확장된다. 무엇보다도 라마를 위한 건축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게 한 일은 요시야의 활동을 추측하게 만들어 준다(왕하 23:8).86 한편, 왕상 15:20의 군대장관(~yliÛy"x]h;)이라는 용어가 요시야와 가까운 시대의 어휘로 볼 수 있기 때문에(왕하 25:23; 렘 40:7,13; 41:11,13; 42:1,8; 43:4,5), 아사의 활동은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연구자는 특별히 20절의 지명과 관련하여 해석을 확대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20절의 지명에 대해서 역대기는 혼동하고 있다(대하 16:4). 그 주요한 원인을 제공하는 지명이 바로 ‘아벨벧마아가’이다. 이 지역이 요단 동편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주장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각주 43을 보라). 아벨벧마아가라는 지명은 요압이 세바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내러티브(삼하 20:14-22)에서 ‘아벨(hl'be²a')’과 ‘벧마아가(hk'Þ[]m; tybeîW)’로 분리되어서 등장하고 있다(14절). 그런데 이 내러티브는 역사적인 장면보다는 후대에 창작된 성격이 짙다. 예를 들면, 15절의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성을 정복하는 방식은 시대착오적이라 하겠다. 오히려 내러티브는 “야웨의 기업이며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알지 못하고 파괴적으로 정복하려는 요압의 무자비함을 나타내려는 수사법으로 보는 것이 낫다(19절; 참조 삼하 20:10).87 또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혜로운 여인”의 모티프는 의도된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16절).88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아벨과 벳마아가가 “야웨의 기업”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B. 마자르(B. Mazar)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그술과 마아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 지역(바산)이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서 유력한 가문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자세하게 논증하고 있다.89 사실 구약의 전승은 이 지역에 대하여 독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술과 마아가와 관련된 지역은 유독 “오늘날까지”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신 3:14; 수 13:13). 이는 다윗 왕이 그술 왕의 딸 마아가과 결혼했다는 언급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삼하 3:3). 요시야 왕은 이 지역에 어떤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야웨의 기업으로 여길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단지 만들어진 옛 전승을 토대로 황금의 땅을 욕심냈던 것은 아닌가?(신 3:14) 혹시 정략결혼을 통해서 후원세력을 확보하려던 것은 아닐까?90 혹은 그 반대로 외부적인 세력을 단절하려는 시도인가? 그러나 열왕기서에 보도하고 있는 남유다 말기 정권의 변동을 보면, 대부분의 혼인관계가 특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것 같다. 어찌되었건 서기관들이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를 폐위시킴으로서 DH에서 아사를 등장시킨 것은 탁월한 상황의 반전임에 분명한 일이다.

        아사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에 비견되는 인물이다(왕상 15:11; 왕하 18:8; 22:2).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사는 이미 이렇게 의도된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할 문제는 ‘다윗을 따르는 정직한 행동이란’ 바로 (고대 사회의 정치·경제·종교를 확연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종교개혁에 있다는 내러티브의 주장이라고 하겠다(왕상 15:12-13). 물론 이러한 개혁의 빌미는 앞선 (여로보암을 상정하고 제시되고 있는) 르호보암 시대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왕상 14:23-24). 따라서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91 열조가 지은 모든 우상(~yliêLuGIh;-lK'-ta,)을 없이하였다. 그런데 13절의 사건은 단순한 종교개혁 이상의 문제가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왜냐하면 “태후(hr"êybiG>)”라는 독특한 직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3절은 문학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점들이 나타난다. 즉, 일종의 두음법칙이라는 수사적 기법이 나타나고 있으며,92 또한 잘 사용되지 않았던 접속사(~g:åw>)를 통해서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이고 있다.93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구절은 단순하게 넘어갈 수 없다. 사실 이 사건은 매우 정교하게 꾸며진 정치적인 사안이다.

        태후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 중에 있는데, 과거의 연구를 계승 발전시키거나 혹은 전혀 새로운 주장까지도 소개되고 있다.94 대부분의 연구들은 기존의 왕 중심의 단편화된 왕조연구에 신선한 대안이 되는 것으로 태후의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즉, 태후는 대게 왕의 부고 시에 다음 왕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직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즉, 태후는 단지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그 배경에 존재하는 ‘외척세력’을 감안해야 된다는 말이다. 사실 결혼 자체가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결혼이기 때문에, 왕권이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세력을 제공해주는 집단을 선택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이는 자연히 지속적으로 세력을 잡으려는 열망으로 발전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태후를 통해서 이후의 왕권까지도 결정하려는 정권욕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민감한 사항은 특별히 요시야 시대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유다 말기에 흔들리는 왕권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그 국민(#r<a'êh'-~[;)”은 이와 관련하여 주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왕하 21:24).95 이런 연구는 상당히 방대한 것이기 때문에 본 소논문에서 다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여기에서 연구자는 특별히 수잔 애커맨(Susan Ackerman)의 연구에 집중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특별히 태후가 “아세라의 인간적인 대행자(representative)일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리자(surrogate)였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96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해서 그동안 성서가 말하는 대로 믿어온 것이 사실이었다.97 이것은 특별히 유일신론적인 배경에서 출발하여, 일종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켰던 과거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은 실재 있었을 법한 전혀 새로운 현실을 소개하고 있다.98 가장 중요한 출발이라고 한다면, 종교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 점이라고 하겠다. 즉,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는 성서 기록자들의 종교와 이러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중들의 민간 종교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99 그들은 성서 본문의 이면을 읽어 내거나, 고고학적인 자료들로 새로운 본문 읽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일상적인 차원에서 종교라는 영역은 여성의 것이라는 것이다.100 고대 이스라엘 민간 사회에서도,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며 집안의 살림을 이끌었던 사람은 역시 어머니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진다. 생명의 탄생자이자 또한 보존자로서의 어머니는 고대 사회에 뿌리 깊이 인식된 주제였다.101 이러한 어머니는 쉽게 여신으로 변환되었고,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아세라였다. 따라서 고대 근동에 자연스럽게 소속되어 있는 고대 이스라엘 역시 아세라를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102 이것은 이방적인 종교 풍습이 스며든 것도 아니며, 오히려 고대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 속에 숨어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인다르트 다익스트라(Meindert Dijkstra)는 여신 아세라 전승이 들어있는 가장 오랜 본문으로 신 33:2-3을 소개한다:


야웨께서 시나이에서 오셨다

그리고 그의 땅인 세일에서부터 비추셨으니,

그가 바란 상에서부터 자신을 보여주셨도다.

그렇고 말고, 그는 무수한 쿠드슈(Qudhsu) 가운데 왔으며,

그의 오른 손엔 그의 아세라가 (있었다).

실로, 그가 백성을 사랑하시니

그의 왼편에 모든 그의 거룩한 이(신)들이 (있도다).103


그러므로 아세라는 고대 이스라엘 전역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기둥(tAbßCem;)의 형태로 각 주요 성읍의 성소/성전 입구에 세워지기도 하였다.104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아세라 숭배를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말해버리고 만 셈이 된다(왕상 7:21; 왕하 21:7; 23:4,7).105 이렇게 아세라는 이스라엘과 함께 숨을 쉬었다. 바로 요시야가 개혁의 대상으로 삼기 전까지는 말이다.

        앞선 왕상 15:13의 “혐오스러운(tc,l,Þp.mi)”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해석자는 윌리엄 G. 데버(William G. Dever)라고 하겠다.106 그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정통 종교가 민간 종교를 억압하는 기제(mechanism)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아세라를 숭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아가를 정죄하길 원했던 것이다.”107 정말 마아가는 통상적인 수준의 나무 이상의 모양을 만들면서까지 아세라 숭배에 열정적이었던 것일까?108 정말 아세라를 숭배하는 일이 야웨종교에 위배되는 일일까? 과연 야웨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예언자들이 공격했던 윤리 의식의 부재가 전적으로 아세라 숭배와 관련 있는 일이란 말인가?109 데버는 서기관의 ‘책의 종교’와 대중의 ‘민간 종교’ 사이에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110 이를 위의 본문과 관련시켜보자면, 이스라엘식의 아세라 상은 그 외설적으로 보일만한 것들이 상당히 감소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이러한 것을 보고 무서워 떠는 것은 상당한 이데올로기가 함의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데버의 바램은 Dtr의 기발한 단어인 tc,l,Þp.mi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지오니 제비트(Ziony Zevit) 역시 12절의 우상들(~yliLuGIh;)이 이스라엘 우상숭배에서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단어이지만, “혐오스러운(tc,l,Þp.mi)”이라는 표현은 이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11 결국, 본문은 기록자의 의도대로 읽혀지기 위해서 치밀하게 연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아세라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연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라가 Dtr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은 이후의 연구 과제를 제공한다 하겠으며,112 특별히 이를 왕정 시스템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 속에서 읽어내는 연구가 요구된다고 생각한다(역시 이 점이 연구자의 논문 방향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표면적인 차원에서는 순수 신앙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긴밀하게 짜여있는 정체 세력들 간의 숨 막히는 혈투가 숨어있다고 하겠다. 비록 데버는 그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지만, 연구자는 태후의 배경에 들어있는 외척세력을 염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이 부분은 장차 예레미야서를 중심으로 관련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이 주제는 연구자의 박사논문의 주된 연구 분야이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요시야는 외척세력을 견제하길 원했으며, 요시야의 서기관들은 ‘책의 종교’를 사수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태후 마아가의 ‘폐위’와 아세라 상의 ‘폐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후기


약자의 바리케이트가 되는 역사책113


      역사에 의문을 품는 일은 많은 이들을 혼동시키며 지속되어왔던 방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본래 대중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눈으로 봐야만 한다. 역사가 신학과 조우하게 될 때 그 파괴력은 가히 엄청나다는 점을 키스 휘틀렘(Keith W. Whitelam)은 잘 보여주었다.114 본 연구는 역사가 신학과 만나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파괴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물론 아비얌과 아사가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관계일 수 있으며, 남색하는 자들로 인해 사회가 문란해졌을 수도 있다. 없던 금은이 다시 생겨서 외교자금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 아사는 전립선 암으로 고생하다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추측들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이 기록물 앞에서 쾌재를 부를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반대로 가슴을 치며 억울해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열왕기서 15장 앞에서 국민의 5%도 되지 않는 사람들은 박수를 쳤지만, 고되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대중들은 쉬쉬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종교적 본성은 “대지와 같은” 것이기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이 넘어간다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토양 자체는 바꿔지지 않았다.115 사실 아사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왕하 18:4), 또한 이것이 요시야 개혁 이후의 남겨진 고고학적 유물에서 읽히는 실제 역사이기도 하다.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