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3장 19-33절의 사회-문학적 연구
(*히브리어 표기가 인터넷 상에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본 글에서는 히브리어를 음역했음을 알립니다)
성문서의 문학적 연구 세미나(2008.10.14)
담당교수: 이형원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2학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 함께 눈물을 뿌리자!”:
예레미야 애가 3장 19-33절의 사회-문학적 연구
1. 서론
이스라엘을 향한 피 끓는 예언자들의 계속된 심판신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예언의 성취로 나타났다. 즉 신명기 28장 63-68절의 내용과 같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땅에서 뽑혀서,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흩어졌으며, 마음이 떨고 눈이 쇠하며 정신이 산란하게” 되었다. 열왕기하 25장 8-12절은 이러한 예언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호와의 전과 왕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이 불타 무너져 내렸으며, “예루살렘 사면 성벽이 헐렸으며,” “성중에 남아있는 사람은 다 사로 잡혀” 갔다. 이것은 성서만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며,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해서 당시에 처참한 상황을 충분히 재구성하고 있다.1 유다 사회는 기원전 587년의 사건으로 인해서 완전히 마비되고 만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의 말과 같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심력이 본토를 떠나 버렸다.”2 그렇다. 이것은 “구약의 신앙이 사라져버리는 결정적인 순간”3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약속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여기에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레미야 애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애가’(키나)가 남았으며, 이 애가4를 통해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애가는 유대인들의 속죄일인 아브월 9일에 읽혀지면서, 조상들의 죄가 바로 우리의 죄임을 인정하고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5 애가는 그 내용에 있어서 절절한 슬픔과 구원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독특한 답관체 시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 섬세한 표현을 연구하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본 연구는 애가 3장 19-33절을 분석하면서, 애가의 비유적 언어 이해가 신학적 메시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보려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1) 본문의 배경을 설정하고, (2) 주석적 접근으로 본문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를 구하며(장르와 내용은 무엇인가?), (3) 본문에 나타난 비유적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심층적 의미를 찾아보고(전체 구조 안에서 본문이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 그 실제적인 기교는 무엇인가?), (4) 본문의 내용과 전달 방법의 분석이 어떠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이러한 문학적 기교는 무엇을 부각시키고 있는가?)를 파악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 그러한 이해가 결국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의 신앙에 있어서 어떠한 적용이 되어야 하는지를 제안하도록 하겠다.
2. 본론
1) 애가의 배경은 무엇인가: 예레미야서를 중심으로
예레미야 39-43장은 예루살렘의 함락의 과정을, 열왕기서의 보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모든 사건들을 기록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파괴의 사건으로 애가의 배경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6 (예레미야) 본문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두려움’이다. 시드기야 왕이 사로잡히고 나라의 행정권도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39:11). 허허 벌판이 되어버린 곳에서 “남녀와 유아와 빈민”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험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40:7). 그나마 남아있던 권력가들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삼삼오오 분열했으니(41:7), 출애굽의 기적을 망각한 채 이스라엘은 다시 ‘입애굽’을 시도했다(42:14).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즉, 우리의 죄로 인해서 닥쳐진 이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이 시험의 때를 야웨를 신뢰함으로 견뎌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라도 피할 수는 없었다. 바벨론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은 거기에서 때를 기다려야만 했으며, 남은 자들은 여기에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칼과 기근과 염병”의 공포는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34:17). 지금 이스라엘에는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애 3:47).
2) ‘애가’의 내용은 무엇인가: 장르와 주석적 본문 이해를 중심으로
이제 애가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여기에서는 장르와 그 내용을 다루도록 한다. 애 1:1은 에이카로 시작하면서 3+2조의 독특한 ‘키나’ 운율과 함께 ‘애가’라는 장르의 시작을 알린다.7 이는 말 그대로 ‘슬픈 노래’로 직접적으로는 장송곡으로 여길 수 있는데,8 이것이 보다 확장되어서 저자와 혹은 공동체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항변하는 시로 볼 수 있다.9 이는 시편의 여러 부분에서도 등장한다(44; 74; 79; 80; 89 특별히 89:38-51). 그러나 애가는 탄식이나 불평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삶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가는 언제나 탄원의 기도로 끝을 맺는다.10 이러한 애가는 고대근동에서도 널리 알려졌던 장르로, “우르의 파괴에 대한 애가”는 좋은 예가 된다.11 그러나 애가와 고대근동의 그것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우르의 파괴가 변덕스러운 신의 횡포였다고 한다면, 애가에서의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구상에 야웨의 통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3:37).12
일단 애가 전체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가는 교차대구적인 구조를 보여주는데, 1장과 5장은 사건 자체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을, 2장과 4장은 생생하게 그려지는 죽음과 파괴를 통한 가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3장은 애가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국가적인 “우리”와 함께 몇 개의 “나” 화자가 등장하면서, 난해하지만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자비를 내리실 것이라는 인내심을 말한다.13 각 장은 22연의 시로 이루어졌는데,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짜여있다(답관체 형식). 이 답관체 형식을 통해서 시인은 분노와 고통 그리고 고뇌를 전달하게 되는데, 완전하게 그리고 매우 절제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14 한편 이렇게 잘 짜인 구조라고 한다면, 파괴의 혼란에서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려는 암시적인 의도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15 답관체라는 독특한 구조에 예외가 있다. 우선, 마지막 장인 5장은 답관체 형식도 아니고 ‘키나’ 운율도 띄고 있지는 않지만, 22연의 시로 되어 있어서 앞선 애가들의 분위기를 이어받고 있다. 이는 질서의 부정을 뜻하는 것으로 읽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시의 마무리인 21-22절은 야웨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답관체의 형식은 오히려 앞선 답관체가 주었던 강력함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어받고 있다고 하겠다.16 또한 3장도 독특한데, 연이은 3행이 답관체 형식을 이루어 총 66절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가의 중심을 이루면서 동시에, 그 모습도 3중으로 되어있어서 탄탄하게 잘 짜여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각 행이 서로 독립적이다.
이제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상술해보도록 하자: 1장은 도시의 파괴를 그리고 있는데, 관찰자로서 시인의 입장에서(1-11절) 그리고 여성화된 예루살렘 그 자체의 입장에서(12-22절)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고” 이방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성소에 그들이 들어가” 버렸다(10절).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었다(20절). 2장은 야웨가 어떻게 이스라엘과 유다를 파괴했는지를 처절하고 묘사적으로 보여준다.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으며,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렸다”(5절). 그러므로 목격자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 앞에 절규한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11절). 3장은 개인적인 애가로 예루살렘의 상황보다는 구원을 바라며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9절). 4장에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포위와 파괴 이후의 상황에서 생존자들의 고통을 보여준다: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9절). 마지막으로 5장은 야웨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기억하며 더 나아가 회복시켜줄 것을 간청하는 공동체의 애가로 마무리된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21절).
절망이 지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소망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3장의 시작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즉, 3장은 1:1; 2:1; 4:1과는 달리 ‘애가’(에이카)로 시작하지 않는다(아니 하게베르로 시작한다). 이처럼 3장은 ‘강한 남자’로 지칭하는 1인칭 화자로 시작하는데, 이는 40절에서 ‘우리’로 확장된다. 한편, 3장의 구조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캐슬린 오커너(Kathleen M. O'Connor)는 화자의 불평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17
3:1-42 강한 남자의 첫 번째 불평
1-20: 적들의 넘치는 사나움
21-39: 자비를 기대하는 이유
40-42: 회개로의 초청
3:43-66 강한 남자의 두 번째 불평
43-54: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았다
55-63: 하나님이 구출하셨으며 하실 것이다.
64-66: 정의를 간청함
한편, 델버트 힐러스(Delbert R. Hillers)와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개인과 공동체의 구조로 분석하고 있다(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18
3:1-39 개인의 고통은 지속적인 신앙과 참회를 이끌어 낸다.
3:40-41 전환: 고난을 당한 자는 자신의 백성을 불러서 하나님으로 이끈다.
3:42-66 공동체의 애가와 탄원으로 확대된다.
연구자는 오커너가 지나치게 애가의 ‘깊은 슬픔’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러므로 힐러스와 베스터만의 ‘전환의 국면’에 신앙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연구 본문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이제 본문인 3:19-33을 살펴보도록 하자.
파괴와 유배는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였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었다(1:18). 계속적으로 화자를 바꾸어가면서 진행되던 애가는(1,2장) 3장에 와서 ‘용사의 호소’로 전환된다. 자신의 멸망은 전쟁 패배의 결과가 아닌, 순전히 신적 심판이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기에 애가는 계속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다: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8절). 구원의 간구는 즉각적인 손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70년의 시간은 상징 이상의 깊은 터널이었다. 애가는 암흑 속에서 쉽사리 구원의 소망을 저버리는 유혹에 빠진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18절). 그러한 상황에서 애가는 신앙의 대전환을 보여준다. 19-20절의 세 번의 ‘기억’(자카르)은 그동안 지배했던 ‘고통’(아니)에 새로운 길을 열어 놓는다(이는 후에 33절에서 “고생(아니)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19
이제 그는 희망을 품는다: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알-켄 오힐)...내가 저를 바라리라(알-켄 오힐 로)”(21,24절). 이는 21-24절의 놀라운 구절을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아우르고 있다. 20절에서 ‘엎드러졌던’(슈아흐) 화자는, 21절에서 ‘회복한다’(슈브). 그 이유는 야웨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22절 본문은 야웨의 인자함을 앞으로 도치시키면서 답관체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하세데 야웨), 신앙의 대상과 신앙의 이유를 극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치지 않기 때문이며,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해서 미학적으로도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23절에서 ‘아침들에게(라베카림) 있어 새로운 것들(하다심)뿐이다’라는 의도적인 복수형을 통해서 야웨의 성실하심을 ‘문자 그대로!’ “크다”(라바)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웨를 온전히 알아가는 과정에서 신앙은 완전해지고 온전히 세워진다. 애가는 이제 소망의 확신을 자기 자신에게 선포한다. 20절에서 엎드러졌던 ‘내 영혼’(나프시)은 이제 기뻐 일어난다: “내 영혼이 말하기를 야웨가 나의 분깃이다!”(24절)
이제 25절부터 27절까지 3개의 독립된 구절은 비극 속에서 ‘좋음’(토브)을 선포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승화된다. 이제 화자가 해야 할 일은 “야웨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26절, 토브 베야힐 베두맘).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접속사(와우)를 연이어 삽입하면서 기다림을 구체화함을 알 수 있다. 3:1에서 고난당해 불평하는 ‘용사’(하게베르)는 27절에서 “짐을 지는 것이” 좋은 일로 여겨지는 ‘용사’(라게베르)가 된다. 이렇게 신앙은 현재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힘이 된다. 역시 그 기원은 야웨의 인자하심이다.
이제 화자는 28-30절의 구절을 통해서, 세 번의 연속된 의미상의 명령을 내린다: “앉으라”(예세브, 28절) “갖다 대라”(이텐, 29절) 그리고 “돌려라”(이텐, 30절). 각 명령은 답관체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어떠한 특정한 상황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 순종하라’라는 수사학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리라(이텐)”는 예수의 산상수훈이 애가의 화자에게 먼저 요구되고 있는 셈이다.
화자가 이렇게 모든 상황에서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이유(키)가 있다. ‘나의 주’(아도나이)는 영원히 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며(31절), 그 분은 비록 슬픔을 주시기는 하지만 연민을 품으시고 그의 인애가 넘치듯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며(32절), 무엇보다도 그는 그 중심에서부터 고난을 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33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절의 ‘나의 고통’(아네니)은 33절에서 더 이상 ‘고통’(인나)이 되지 않는다. 특별히 지속적인 ‘키나’ 운율을 파괴하는 31절의 ‘나의 주’라는 표현은 화자의 신앙에 ‘키워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렇게 애가는 그 중심에서(center) 구원의 소망과 그로 인한 환희의 찬가라는 핵심(core)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3) 애가는 어떻게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 비유적 언어 분석을 중심으로
(1) 사상적 비유법(figures of thought)
이렇게 본문은 (1) 화자의 절체절명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19절의 쓴쑥과 쓸개즙, 30절의 뺨을 때리다와 모욕을 채우다). 이것은 앞 장에서 계속적으로 다루어진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2) 화자는 계속되는 슬픔 속에서 하나의 빛을 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야웨였다. 애가는 야웨의 다양한 이미지들 중에서 ‘인자’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23절에서 변함없이 새로운 아침들이라는 자연적인 이미지로 나타낸다. 사실 파괴된 시온에게 있어서 계속되는 아침은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날마다 새로운 아침들 속에서 야웨의 구원을 보게 했다.
(2) 수사학적 비유법(rhetorical figures)
전반적인 표현들은 주석과정에서 다루었으므로(19절의 유음법[나의 고통과 나의 불안], 19-20절의 반복법[기억하다], 22절의 도치법[야웨의 인자하심], 22절의 반복법[하기 때문이라], 23절의 유음법[새로운 아침들], 25-27절의 반복법[좋다], 26절의 접속사삽입법[ו반복], 31-33저의 반복법[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특징적인 사항을 간추려보도록 하겠다. 우선, 본문은 전체적으로 두 개의 큰 수미쌍관법을 보여준다. 먼저는 19-33절의 전체적인 관계이다. 즉, 이전의 고통은 사라지고 이후의 고통은 야웨의 뜻이 아니라는 ‘신적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21-24절로, 이것은 소망을 품는 화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본문은 답관체의 형식을 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3행마다 각 자음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25-27절에는 ‘좋다’(토브)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고, 31-33절에는 ‘왜냐하면’(키)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 부분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즉, 신앙적인 고백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며, 같은 표현을 통해서 보다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있는 수사학적 비유법을 찾아보았다. 연구자가 제시한 것보다 더 많은 비유법이 들어있을 것이며, 이는 애가의 절망적인 분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신앙의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애가는 이성과 감성을 모두 사용해서 전인적인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실 랍비들이 애가를 낭독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맛을 더 느낄 수 있는데, 3+2조의 키나가 주는 전통적인 애절함 자체가 수사적인 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4) 애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합하면서
이상과 같이 우리는 애가의 배경과 주된 내용, 그리고 비유적 언어 분석을 통해서 입체적인 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떠한 ‘신적 해결책’을 주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합하면서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① 애가를 부르라: 애가는 눈물이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그 모든 이유를 소위 ‘신명기적’으로만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욥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심판’의 고리는 상식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가장 일차적인 진단이 바로 ‘죄와 심판’의 렌즈일 것이다.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야웨께 거역했기 때문이다(1:18). 그러므로 이들은 회개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돌이켜야(슈브) 한다(3:40). 애가는 눈물의 회개를 요구한다. 현대인들에게 사라진 눈물의 회개를 애가는 요구하는 것이다.
② 야웨는 인자하시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는 또 하나의 억압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로 하여금 ‘감시자’나 ‘처벌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공의 와 사랑이 함께 하는 온전한 하나님을 성서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사실 ‘지금 여기에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야웨의 인자이며(23절), 심판을 넘어선 “본심이 아니다”(33절)라는 위로였기 때문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보다, 한모금의 물이 필요하다는 영적 민감성이 목사에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③ 기다리라: 멸망의 대국면은 급히 전환되지 않는다. 그들은 70년의 터널을 지나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좋은’ 마음으로 그것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환상에서 우리를 건져낸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즉흥성만을 강조해서 성도들에게 참지 못하는 신앙을 가리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기다렸고, 모세가 기다렸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야웨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3. 결론
본 소논문은 애가 3장 19-33절을 중심으로 그 배경과 본문의 내용을 파악했고, 그리고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표현된 문학적 기교들을 조사했다. 이어서 본문의 메시지와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적용점들을 제시했다. 연구에 따르면 본문은 예레미야서를 배경으로 멸망한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상황을 다각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키나조의 애가로, 야웨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문제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원리를 지적한 바는 애가를 뛰어넘어 성서의 가르침이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매를 들면서 그 중심에 ‘큰 인자와 성실’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도 성서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닥치는 사방의 위협에서부터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을 보다 적극적으로(문학적으로!) 소개하고, 나타내며, 재연해 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실천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한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끝
- J. Maxwell Miller and John H. Hayes, 「고대 이스라엘 역사」,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525-6. [본문으로]
- John Bright, 「이스라엘 역사」, 엄성옥 역 (4판;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2), 436. [본문으로]
- Walter Brueggemann,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The Canon and Christian Imagina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334. [본문으로]
- 편의상 예레미야애가를 ‘애가’로 줄여서 칭하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 Eugene H. Peterson, 「유진 피터슨의 목회오경」, 차성구 역 (서울: 좋은씨앗, 2001), 139. [본문으로]
-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John. J. Collins, Introduction to the Hebrew Bib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348에서 콜린스는 예레미야가 애가의 저자였을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84), 409에서 보아트는 예레미야와 문체적인 면에 있어서도 많은 유사점을 지적한다(2:13//렘 8:22;30:13; 2:14//렘 23:11,14,16; 2:18//렘 9:1). [본문으로]
- 선우 남, 「예레미야애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80. [본문으로]
- 다윗의 애가(삼하 1:17-27; 3:33-34)를 예를 들 수 있겠다. [본문으로]
- Gordon McConville, Exploring the Old Testament, Vol 4. The Prophets (London: SPCK, 2002), 75. [본문으로]
- Cluas Westermann, Lamentations: Issues and Interpretation, tr. Charles Muenchow (Edinburgh: T&T Clark, 1994), 96. [본문으로]
- ANET, 455-63. [본문으로]
- Bruce K. Waltke,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2007), 163. [본문으로]
- Norman K. Gottwald, The Hebrew Bible: A Socio-Literary Introduc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43. [본문으로]
-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84), 406; Walter Brueggemann,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The Canon and Christian Imagina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335. [본문으로]
- Steven L. McKenzie and John Kaltner, The Old Testament: Its Background, Growth, & Content (Nashville: Abingdon Press, 2007), 343. [본문으로]
- Delbert R. Hillers, Lamentatio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New York: Doubleday & Company, 1972), 102. [본문으로]
- Kathleen M. O'Connor, “The Book of Lamentations: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 The New Interpreter's Bible: A Commentary in Twelve Volumes (Vol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1047. [본문으로]
- Hillers, Lamentations, 65; Westermann, Lamentations, 189. [본문으로]
- 그러므로 19절과 33절은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