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2008-2] 마가복음 세미나(4): Christopher D. Marshall

진실과열정 2008. 10. 7. 16:03

마가복음 세미나(2008.10.7)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2학기)

Christopher D. Marshall, Faith as a Theme in Mark's Narrative (1989), 134-240.


※저자인 Christopher D. Marshall은 뉴질랜드의 성서대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있으며, 본서는 1985년 G. N. Stanton 교수의 지도 아래 출간된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Beyond Retribution: A New Testament Vision for Justice(2001), Crowned in Glory and Honor: Human Rights in the Biblical Tradition(2002) 등의 책을 출간했다.


마샬은 이 책의 제목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마가복음을 내러티브 비평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해서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내러티브를 풀어나가는 주요한 관점이 ‘메시야 비밀,’ ‘제자도,’ ‘인자 기독론,’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다양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믿음’이라는 열쇠가 마가복음 이해에 주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본격적인 내러티브 비평을 하기위해서, 저자는 마가복음 내에 문학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표현 기술’이 가득하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저자는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문학작품(즉 마가복음)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다소 ‘절충주의적’인 입장을 선택하고 있어서(p.8),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논리적 비약이 보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5-6장, 그리고 결론인 7장을 정리하고, 평가와 필요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겠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의 핵심 출발점은 1:14-15의 본문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믿음의 개념이 이후의 복음서 내러티브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음을 저자는 보여주려고 한다. 즉, 3장에서는 믿음과 기적과의 관련성을 다루었고, 4장에서는 믿음이 특별히 ‘약자’들과 관련해서 다양하게 기능하고 있는 다섯 본문을 분석한다. 이제 저자는 마가복음에서 유독 믿음이 없다고 인식되고 있는 ‘제자’의 문제에 집중한다. 바로 5장과 6장이 그것인데, 5장에서는 (1) 믿음과 제자가 된다는 것의 관련성, (2) 믿음과 제자를 구성하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와의 관련성을 다룬다. 이어서 6장에서는 ‘불신’에 대한 문제와 믿음과의 관련성을 다룬다.


5장: 믿음과 제자도


        저자는 (1) “제자로의 부름”에 관련된 본문 연구를 진행한다. 저자는 1:14-20과 10:46-52의 본문이 수미쌍관식으로 마가복음의 중요한 틀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앞의 본문은 예수의 부름에 자신의 소유(배와 그물, 가족)를 버리면서 쫓는 믿음을 말한다면, 뒤의 본문(“소경 거지 바디메오”)은 보다 자발적인 차원에서 역시 소유(겉옷)를 버리면서 예수를 좇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앞의 본문이 1:14-15에서 시작하고 있는, 예수에 의한 선택적 제자도라고 한다면, 뒤의 본문은 8-10장에서 부각되고 있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수난예고의 긴장 가운데, 자원적인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13장의 본문도 포함을 시키면서, 거짓 메시야가 아니라 참 메시야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마가공동체의 현실적인 믿음의 차원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이어서 저자는 (2) “새로운 믿음 공동체”라는 주제로 나아가는데, 즉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11장을 분석하면서, 내러티브는 기존의 성전 공동체에서 벗어나서 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공동체에서 믿음은 만민이 들어올 수 있는 열쇠 정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은 적극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을 모방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이며, 이렇게 저자는 믿음과 기도의 깊은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6장: 불신의 성격


        이제 저자는 마가복음의 ‘믿음’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가장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불신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일단 예수의 대적들의 불신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저자는 네 개의 본문 연구를 시도한다(2:1-12; 6:1-6; 11:27-33; 15:27-32). 이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대적들이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수에 대한 인식의 혼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2:7; 6Z:2; 11:28; 15:31).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데, 이는 예수를 신성모독의 범주로 정죄하면서 구체화된다.

        이어서 저자는 제자들의 불신을 다룬다. 두 개의 본문을 다루면서, 제자들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못하면서 믿음/불신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됨을 말한다. 우선 폭풍이 이는 바다의 장면은(4:35-41) ‘믿지 못하는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예수의 독특한 정체를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귀신을 축출하지 못한 사건은(9:14-29) 제자들이 예수의 공급과 보호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의 사역을 믿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분명하게 마가의 기독론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불신 혹은 갈등의 소재가 문학적으로도 다양한 기교를 통해서(아이러니, 수수께끼, 수사적 질문 등) 나타나고 있음을 언급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의 다가오는 통치와 그것의 도래를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불신’이라는 측면이 드러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의 본문들은 그냥 개별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큰 그림 안에서 기능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예수의 대적들은 진리에 대한 거부자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점점 구체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제자들도 역시 불신을 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어떠한 상황에서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불신으로 여겨지며, 그러므로 제자(혹은 독자)는 지속적인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믿음의 승리를 향해 끊임없는 노력(‘continuing struggle’)을 하는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


7장: 결론


        결론에서 저자는 마가복음의 내러티브 안에서 기능하는 ‘믿음’이라는 주제를 체계화한다. 우선 저자는 기존의 역사비평적 접근보다는 문학적(내러티브) 접근이 최종 본문의 메시지를 꺼내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한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믿음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1) 믿음의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실현하는 예수의 선포의 차원과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간청하는 사람들의 필요로 나타난다. (2)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예수이다. 그런데 신자의 내재적인 믿음에서도 찾아지기도 하는데, 하지만 신적인 공급이 없었다면 불신으로 그친다고 지적한다. (3) 믿음의 정황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가 되며, 심지어는 십자가의 사건 역시(삶의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4) 믿음의 필요조건은 단지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이 계시되는 것으로 여기는, 즉 예수에 대한 의존적인 태도이다. (5) 이제 믿음에 대한 경험을 다양한 요소들로 분류한다: 믿음은 개별적인 사건이다(5:34; 10:52). 믿음은 지식은 아니지만 인지해야하는(‘보다’) 통찰력이다. 믿음은 보이는 행동으로(2:5), 여기에는 회개와 갈등, 결과적인 순종이 나타난다. (6) 믿음의 기원은 바로 예수의 인격과 그의 행동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주권(통치)이 현재하기 때문이다.




2. 평가


 1) 저자는 내러티브 비평을 통해서 그동안 강조되지 않았던(혹은 저자의 표현과 같이, ‘방치된’) 믿음이라는 주제를 잘 보여주었다.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이 일관되어 있어서 혼란스럽지 않았다. 즉, 우선 기존의 역사비평적인 해석들을 언급하면서 그 방법론의 해석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다르게(즉, 내러티브 비평으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저자의 글을 통해서 ‘새로운 주석’을 보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더구나 저자는 문학적인 측면도 부각시키면서 마가복음의 메시지가 다양한 문학기법들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되려고 의도되었음을 잘 지적한 것 같다. (이러한 수사적인 측면은 본문에 대한 좋은 통찰력을 주며, 설교자들에게 마가의 입을 달아준 것 같아서 매우 반가웠다.)

 

 2) 그렇지만 몇 가지 비평적 요소들이 있다. 첫 번째는 내러티브 비평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즉, 방법론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p.91), “그러한 복음서의 내러티브가 과연 성공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16:9이후의 후기 삽입된 ‘상당히 과장된 어조의 믿음의 요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 번째로, 저자는 어휘의 폭이 너무 넓은 것 같다. 즉, 치밀하게 연구되었다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교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혈루병 여인의 예에서와 같이, 믿음이 십자가와 부활까지 확대되는 것은 조금 오버한 것 같다(p.110,123). 세 번째로 저자는 수난 이전의 본문에 집중하는 것 같다. 양적인 면에 있어서 간관할 수 없는 수난 이야기의 성격을 저자 자신이 ‘방치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