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 마가복음 세미나(3): Christopher Bryan, A Preface to Mark
마가복음 세미나(2008.9.30)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2학기)
Christopher Bryan, A Preface to Mark (1993), 126-70.
※저자인 Christopher Bryan은 영국성공회에 소속된 목사겸 교수로, 1983년 Exeter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테네시 주의 스와니(Sewanee) 남부의 신학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다가, 지난해 은퇴했다. 저서로는 본서를 포함하여, A Preface to Romans: Notes on the Letter in Its Literary and Cultural Setting.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And God Spoke: The Authority of the Bible for the Church Today. Cambridge, Mass.: Cowley Publications, 2002; Render to Caesar: Jesus, the Early Church, and the Roman Superpower.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등이 있다.
브라이언은 이 책의 제목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마가복음을 이해하는 단서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의 문학적이며 문화적인 배경 안에서 잘 드러난다는 것인데, 그 배경은 다음 아닌 헬라적 전기(bios)와 구전(orality) 문학이며, 거대한 지중해문화권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학/역사 비평’에 의한 본문 이해가 아니라, 듣거나 상연을 목적으로 한 ‘구전 이야기(oral discourse)’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10장부터 13장까지를 정리하고 저자의 논점을 분석한 후, 평가와 필요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겠다.
10장: 마가의 표현법에 있어서 구전적인 특성들
앞서 마가복음의 구조를 분석한데 이어서, 10장에서는 마가의 표현법에 있어서 나타나는 구전적인 특성들을 몇 가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① 파피아스가 말한바와 같이, 예수에 관한 전승은 당시 헬라 시대의 ‘크레이아’(chreia)라는 짧은 이야기들의 형식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바로 예수의 재치와 지혜를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들로(10:17-22; 12:28-34), 어떠한 사건을 중심으로 언제나 극단을 이루는 두 편으로 나뉘고 있음을 알게 된다(혹은 리듬을 보존한다). 이것은 기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구전적 저작의 특성이 된다. ② 귀신 축출 사건과 같이 예수의 활동에 있어서도, 예수와 그 상대자라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역시, 기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구전적 특성이다. ③ 비유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구전적인 의사소통에 적합한 표현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유 본문에 따르면 그 방식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고(4:3-9//12:1-10), 무엇보다도 극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것들의 대조를 통해서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기억을 용이하는 구전적 특성이다. ④ 마가복음에 종종 등장하는 요약문구(1:39; 2:13; 3:7-12)들은 기억을 정리하게하는 구전 이야기의 전형적인 표현기법이다(일리아드에도 나타난다). ⑤ 수난에 대한 부분에서도 구전적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못 구하면서 남을 구한다는 역설(15:31)이 그것이며(오디세이에도 나타난다), 간결하면서 사실적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부분(14:33f; 15:34)이 그것이며(베오울프에도 나타난다), 죽음을 당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했다는 극적 반전(15:39)도 모두 구전적 특성을 보여주는 기법이다.
11장: 기록된 바: 성서에 대한 마가의 구전적인 특성들
마가의 구약인용을 보면 구전과는 상관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정반대의 논리를 제시한다. 즉, 호머의 경우에서도 기록된 메시지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앞선 주장에 이어서, 마가가 ‘듣기 위한’ 작품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마가가 어떻게 구약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1:1-13에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구약(외경)의 인용이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연상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침례 요한이나 예수의 침례 그리고 광야에서의 시험이라는 ‘사건’이 그 자체로 역사적인 의미로 다가와서는 안 되고, 단지 그러한 것을 말함으로써 전반적인(통상적인) 분위기를 얻는 것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당시에 통용했던 헬라적 방식이기 때문이다(역시 비교 가능한 문헌이 존재한다).
마가는 자신의 주요한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서 암시와 회상의 방식으로 성서를 사용한다. 즉,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개념을 단지 암시하고 회상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1세기 팔레스타인 회당에 널리 알려진 개념이었고, 예수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자’는 본래 단 7장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은 에녹 1서와 제 2에스드라서, 그리고 바룩 2서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수난과 관련해서 상당히 많은 구절들이 인용되었다고 알려졌으나(Kee), 저자는 이를 부인하며 본문상의 인용이 아니라 기억의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두 개의 본문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인용이 나타난다고 보았는데(7:6b-7//사 29:13; 12:10-11//시 117:22-23), 이 구절은 당시에 널리 외워졌던 본문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용이했던 구전적 특성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볼 때, 마가가 “기록된 바”라는 의미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이 용이했거나 쉽게 들었던 구절들을 사용했던 것일 뿐이며, 이는 마가복음의 구전적 특성을 보여주는 단면이 된다.
12장: 결론: 마가의 상황에서 보자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마가는 ‘듣기 위해’ 기록했다. 이는 또한 전문적인 연기자에 의해서 상연되었을 가능성도 열어 둔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마가복음은 완전히 구전전승에 의해서 저작된 것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구전전승이라는 것이 시나 지혜로운 말과 같이 짧은 부분일 경우에만 해당되며, 아직까지 문자해독능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헬라문화권의 “전기”(즉 마가복음)를 기록한 저자는 자신이 평소에 즐겼던 문화대로 기억을 수집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마가는 전문적인 서기관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인데, 마가에게서 전문적인 유대 전통을 이용하는 면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Beavis에 반대함). 또한 예언자적이며 묵시적인 전승에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Kee에 반대함). 오히려 마가는 다소간 부유한 사람으로, 도시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활동했었을 것이다(Meeks에 찬성함).
13장: 비과학적 후기
저자는 예수에 대한 다양한 전승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한다(예언자적, 인자, 능력을 행함). 마가복음은 이러한 다양한 예수 전승이 결합된 것이다. 중요한 점이라면 마가만의 기능이 있다는 점으로, 이는 바울에게서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예수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자라는 점이다. 마가는 이 모든 것을 예수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놓고 설명했다. 즉 하나의 ‘삶’을 구전적인 이야기 기법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야기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본질적이며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이 우선적으로 의도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복음을 놓고 하나의 퍼포먼스(연극 혹은 상황극)로 ‘들려지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2. 평가
1) 저자는 생소하지만, 기존의 연구방법들과는 차별적인 독특성을 가지고 마가복음의 구전적인 특성들을 잘 보여주었다. 비록 고대사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 시대적 배경에서 복음서를 읽어냈을 것을 추정해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2) 그러나 저자는 비교문헌학적인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적으로 마가가 이러한 모든 고급문학을 알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며(저자는 이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결국엔 복음서라는 것도 지중해문화권 내에서 특별한 ‘장르’는 아니라는 면에서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헬라문학이 기준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어서 소위 유럽중심의 역사관도 느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