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 Ferreira, Johannine Ecclesiology(1998), 47-137.
요한복음 세미나(2008.4.15)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Johan Ferreira, Johannine Ecclesiology(1998), 47-137.
1. 다시 쓴 3, 4장
1) 3장에서 저자는, 요 17장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가 바로 요한 공동체 자신들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즉, 기도의 삶의 자리를 요한 공동체와 회당 간의 대결 구도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기도가 요한 공동체의 자기 이해였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바로 교회론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저자는 예수의 기도의 맥락과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1) 유대인들의 기도 방식과 비교를 통해서, (2) 고별 강화의 일부분이라는 문학적 특성을 통해서, 그리고 (3) 요 17장의 구조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진행하고 있다.
2) 저자는 예수의 기도를 이해하는데, 유대인들의 기도 형식이었던 ‘법정 기도’를 제시한다. 즉, 유대인의 법정 기도는 ‘대상자-정당화-청원’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요 17장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정 기도의 기능이 본래 변증적인데 있다는 점으로, 요한 공동체의 존재에 있어서 일종의 변호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기도는 자전적이며 교훈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후퇴하는 신앙이 아니라 반대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자세를 가지도록 한다.
3) 한편, 고별 강화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점에 관하여, 13-17장의 구성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지만, 저자는 예수의 이별로 인한 위기-회당과의 갈등-분리 이후의 요한 공동체의 응집력 강화라는 세 번의 과정을 거쳐서 작성되었다고 본다(요 17장은 회당과의 결별과 공동체의 분열 사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요 17장이 강화의 요약이 아니라 절정이며, 공동체를 격려하는 권면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4) 저자는 요 17장의 구조 자체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저자는 시간적인 면과 구조적인 표지들, 그리고 내용 자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분석했는데, 1-8절은 예수 자신에 관하여, 9-19절은 제자들에 관하여, 그리고 20-26절은 미래의 신자들에 관한 내용으로 분석될 수 있다. (저자는 요한의 문학적인 스타일을 여러 가지 소개한다: 평행법, 반복법, 인클루시오, 교차대구, ινα/οτι 반복 등) 이러한 분석에 따라서 다음의 것들이 강조되고 있는데, ①영광, ②아버지 이름의 계시, ③선택, ④연합이다.
5) 4장에서 저자는 이후의 논의를 위해서 요 17장에 대한 석의를 소개한다. 하지만 기존의 주석들이 놓치고 있었던, ‘교회론’의 측면에서 본문을 보려는 시도인 것이다.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요 17장에는 관계가 부각되는 차원에서 교회론이 발견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와 예수가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듯이(파송됨/사랑), 예수와 공동체 역시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선교적 사명/사랑). 즉, 저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석의적으로도 공동체와 떨어질 수 없는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저자는 단어 연구와 관련해서 구약적 배경에서 작업을 진행하며, 때로는 본문 비평을 통해서 더 나은 읽기도 과감하게 선택하기도 한다.
6) 저자는 요 17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그에 맞게 석의도 진행해 나간다. 첫 부분에서 저자는 예수 자신과 관련된 기도를 분석한다(1-8절). 여기에서 저자는 아버지(πατηρ)와 아들(υιος)이라는 단어가 요한의 예수가, 자신들의 대적인 회당의 유대 지도자들과 대조되는, 참된 하나님의 합법적인 계시자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p.84,87). 이러한 합법적인 계시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요한 공동체는 4절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해야하고 또한 공동체를 세우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아들의 사명이었듯이 이제는 공동체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말씀의 소유로 보고 있는데,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말씀(λογος)이 있다면, 예수와 공동체 사이에는 말씀들(ρηματα)이 있다는 논리로(7-8절), 결국 요한공동체가 말씀을 중심으로 둔 교회론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7) 제자들에 관련된 기도를 보여주고 있는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석의에서(9-19절), 저자는 첫 번째 분석과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포인트가 있다면, καθως이다. 즉, 공동체는 예수와 판박이가 되고 있다. 이를 저자는 ‘확대된 그리스도’(Christus prolongatus)라고 말한다(p.120). 공동체가 아들의 계시를 보존한다. 말씀이 곧 명령이고, 명령이 곧 선교라는 논리로 공동체 역시 예수의 선교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행해 나가야 한다.
8) 미래의 신자들에 관련된 기도를 보여주는 세 번째 부분에 대한 석의에서(20-26절), 저자는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을 소개한다. 즉, 여기엔 ινα가 여러 번 걸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①하나가 되고, ②우리 안에 있으며, ③세상으로 믿게 하는 것인데, 이는 점차 발전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점이라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성격(본질)의 차원이 아니라, 기능의 차원에 해당한다는 점이다(p.134).
9) 이렇게 볼 때, 요 17장을 중심으로 본 요한공동체는 매우 긴밀한 관계성을 집중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καθως!). 이 공동체는 예수와 같이, 위로부터 난 공동체이며, 선택된 공동체이며, 선교적 공동체이어야 한다. 결국 저자는 요한의 교회론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무게를 둔다면, (저자의 표현대로) 요한의 교회론은 ‘기독론적 교회론’(christological ecclesiology)이라고 부를 수 있다(p.136).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요 17장이 공동체의 자기반성이 투영된 문학적 창작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10) 한편, 저자는 석의의 직접적인 본문은 아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석하고 있는데, 바로 20장 31절을 목회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선교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πιστευοντες를 부정과거형인 πιστευσητε로 읽는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더 중요한 것은 목회적/선교적 읽기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있다. 이 생명은 편집자의 강조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일차 저자의 숨은 의도라는 것인데, 즉, 복음에 이차적인 성격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단지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는 논리적인 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차저자의 진짜 의도라는 것이다(p.102).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생명에 대한 질문으로 옮기게 된다. 이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 이유에서부터 설명해볼 때, (유대인들에 대한 논쟁적 도구로서의) 표적만을 경험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나아가 예수와 존재론적인 동질화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가 했던 일을 공동체가 똑같이 함으로써(선교!), 자신들이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11) 이러한 차원에서, 세상(κοσμος)은 (초기 영지주의의 개념과 비슷한) 선교적 차원의 구원의 대상이다. 선택과 자유의지라는 뜨거운 감자도, 선교적 차원에서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결정론적’으로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기능적으로 ①공동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변호적 역할을 하고, ②구약적 개념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특권보다는 순종을 강조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요 17장을 중심으로 요한의 교회론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상당 부분이 바울의 그것과는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도 제시하고 있다(p.44,124).
2. 평가와 질문
1) 저자는 바울의 교회론에만 제한된 시각을 열어놓는데 열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복음서의 교회론을 제시했는데, 그것도 공관복음서의 교회론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교회론이기 때문에, 참 신선하면서도 독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L. Martyn과 R. Brown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도 요 17장이 요한의 교회론, 더 나아가 요한의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주장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본문의 배경 이해에 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2)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양한 목소리를 ‘교회론’ 특별히 선교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연역적인 것 같다. 본문비평 작업에 있어서도 공정한 것인지 묻고 싶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석 대신, 선교라는 실제적인 기능을 강조하기 위한 해석으로 보일 정도이다. 사실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무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