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신약 성서

Stephen Voorwinde, Jesus' Emotions in the Fourth Gospel (2005), 67-138

진실과열정 2008. 8. 30. 10:10

요한복음 세미나(2008.4.28)

담당교수:   김광수 교수

발표자: 양지웅(Ph.D.  구약학 1학기)

Stephen Voorwinde, Jesus' Emotions in the Fourth Gospel (2005), 67-138.

 


< 3-4장 요약 >

 1) 지금까지 저자는 요한복음이 구약적인 배경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자가 구약을 붙잡고 있는 주요한 뼈대는 언약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그림에서 ‘↔’는 관계성을 의미).


                      [ 요한복음 ↔{ 구약 ]↔ 언약 }

                            ↑                            

                                          ?

   이젠, 요한복음이 언약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저자는 3장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한다. 그 대답은 요한복음은 언약적인 면으로 읽을 수 있으며, 특별히 오경과 비교하면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구조 안에서 살펴본 예수의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3장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2) 일단 저자는 다시금 요한복음이 구약(특별히 오경)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요 1:1-5과 창 1:10-5의 유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예수가 기존에 알려진 예언자적 위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주로서의 로고스로 등장하게 하며, 특별히 오경과의 연관성을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한편, 4복음서들 가운데 요한복음은 가장 독특하게 예수의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저자는 이를 단순하게 증거본문으로 삼는 것에서 탈피하고,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 가운데에서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3) 그렇다면 예수의 감정은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를 위해서 저자는 사전 작업으로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를 분석한다. 즉 기존의 학자들은 기본적인 구조로 ‘표적과 영광/수난’이라는 양날개적인 그림을 제시했다면(1-12장/13-21장), 저자는 요한복음 내에서 기능하고 있는 중요표지들(시간적/지리적 표지들)이 복잡하게 엮어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구조를 제안한 것은 아니다. 단지 기존의 확연한 구분 대신에 12장을 일종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보자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의 구조를 분석하며, 각 부분에서 예수의 감정이 등장하는 구절을 제시한다:

서론(1장)

표적의 책(2-11장)

과도기(12장)

수난/영광의 책(13-20장)

후기(21장)

 

ζηλος (2:17)

φιλεω (11:3,36)

αγαπαω (11:5)

χαιρω (11:15)

εμβριμαομαι (11:33,38)

ταρασσω (11:33)

δακρυω (11:35)

ταρασσω (12:27)

αγαπαω (13:1; 14:21; 15:9)

(제자)ον ηγαπα (13:23)

(제자)ον εφιλει (20:2)

ταρασσω (13:21)

αγαπη (15:9,10,13)

χαρα (15:11; 17:13)

(제자)ον ηγαπα (21:7)

    그러므로 저자는 표적의 책의 마지막 장인 11장이 책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감정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고별 강화 부분에서 예수의 수난을 예고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감정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4) 이제 저자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요한복음 내에서 오경의 주제들을 찾는 작업을 한다. 즉, 요한복음에서 구약은 단지 인용된 수준이 아니라, 독특한 내러티브의 틀이 될 정도로 강력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에서는 창조와 로고스, 벧엘과 성전, 아브라함과 예수의 선재적 우월성이라는 연관이 나타나고, 출애굽기에서는 장막과 예수, 모세와 예수, 만나와 먹이심이 나타나며, 레위기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수의 신성모독과 그에 대한 율법적 형벌의 관계성이 나타나고, 민수기에서는 놋뱀과 십자가의 연관성,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로서의 예수의 관계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어린양(αμνος),’ ‘장막절,’ ‘유월절,’ ‘표적,’ ‘모세’라는 오경의 주요한 주제들이 예수와 관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5) 결국, 저자는 요한복음이 오경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상징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모형론적 해석 이상의 차원인데, 왜냐하면 그 중심에는 언약적인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주요한 핵심이라고 하겠다. 즉, 저자는 요한복음의 구조에서도 구약의 중요한 개념인 언약 사상이 들어있다고 분석한다. 특별히 ‘표적의 책’은 출애굽기의 ‘구속’이라는 메시지가 평행하며, ‘고별강화’에서는 모세의 고별설교와의 관계에서 신명기적 ‘순종’이라는 메시지가 평행함을 제시한다. 이로 보건데, 요한복음은 오경의 언약이라는 중요한 주제와 상당히 밀접한데, 여기에서 예수는 구속하는 창조주(언약의 주→신성)로도 나타나고, 이와 동시에 순종하는 인간(언약으로서의 희생물→인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수의 다양한 감정들은 - 4장부터 자세하게 다루게 된다 - 지금까지 서술했던 언약적인 틀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


 6) 이제 저자는 제 4장에서 ‘성전에 대한 열심’이라는 부분을 다루는데, 이는 ‘표적의 책’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감정이며, 공관복음서에서는 없는 독특한 단어(ζηλος)를 사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우선 본문을 설정하는데, 1:19-2:25의 넓은 맥락을 선택한다. 이렇게 볼 때, 1장의 ‘어린양’의 맥락이 2장에서 유월절 즈음의 성전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이는 곧 예수의 죽음을 예고한다는 차원에서 성전 정화사건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게 된다(인간성). 하지만 서문에서 이미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장막이 된 참 성전이기 때문에, 요 2:19에서 성전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전혀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로서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권위가 드러나고 있다(신성).

 

 7) 한편, 신성과 인성이 모두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게 중심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시편 69편 10절을 인용하고 있는 요 2:17을 분석하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시편의 본래적인 맥락이 종교적인 논쟁 아래에서 순전히 시편기자의 고난을 기술하는(descriptive) 수준이라면, 요한복음은 (MT→)LXX를 인용하면서 의도적으로 미래형(καταφαγεται)으로 번역을 하면서 예수의 고난을 예견하고(predictive) 있음을 발견한다.

 

 8) 이렇게 볼 때, 저자는 요 2:17에서 고난의 차원에서 예수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요 2:19에서 부활의 차원에서 예수의 신성을 발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중요한 구절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다가올 죽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인간성이 주목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의 낮아짐과 높아짐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본문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한쪽의 목소리가 우세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인간성과 신성이 모두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그럼에도 저자는 마지못해서 인간성의 편을 든다[p.138]). 오히려 더 중요한 점이라면,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예수의 ‘열정’이 죽음과 부활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었다는 점인데, 즉 이들은 ‘언약의 주(신성)’로서 예수가 자신이 가야만 했던 ‘언약적 희생물(인성)’로서의 길을 걸어갔던 열정의 그리스도로 이해했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 평가와 질문 >

 1) ‘예수의 감정연구’라는 주제는 쉽게 보이지만 정말로 쉽지 않은 주제인 것 같다. 단순하게 4장에서 ‘목마름/피곤함’을 언급하거나 11장에서 ‘울었다’와 같은 피상적인 차원에서 연구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요한복음의 새로운 신학적 읽기까지도 얻어낼 정도로 깊이 있는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연구는 새로운 방법론적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너무나 단순한 틀을 논증 없이 나열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 같다. 즉, 저자는 오경을 너무나 단순하게 ‘언약’의 렌즈로만 분석하고 있다. 사실 ‘표적의 책’에만 해도 인클루지오를 이루는 부분은 이사야라고 할 수도 있지 않는가?(1:23; 12:38) 그리고 오경 이외의 책들도 언급되고 있다(시 69; 슥 12). 결국 저자는 언약과 관련하여 ‘언약의 주’로서의 예수의 신성과 ‘언약의 희생물’로서의 예수의 인성이 요한복음의 신학 안에서 녹아있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핵심이 되는 ‘언약’이라는 것에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한 것 같다.

 

 2)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진정한 예수의 감정연구를 시도했으면 어떠했을까 싶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수정했을 정도로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막 1:41,43; 3:5; 10:14 ← 2장에서 저자는 사본상의 문제들을 그냥 넘어가는 것 같다). 요한복음이 서문에서부터 예수의 신성화작업을 견고하게 시도하고 있다고 본다면(수난의 모습), 그 와중에서 요한이 남겨놓으려고 했던 예수의 인간적인 감정은 해석자의 신학적인 분석이 없더라도 오히려 더 큰 효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신학화된 문서에서 인간성을 찾으려다보니, 결국 ‘모두 있다’라는 모범 답안만 반복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