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7-18장의 단 자손의 이야기를 요시야 시대로 분석하기
Philippe Guillaume,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London/New York: T &T Clark International, 2004). Pp. xiii + 325. Cloth, $125.95. ISBN 0826469884.
이번 학기에 읽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는 기존의 신학계의 산성이었던 Noth의 신명기적역사 이론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서만큼은 신명기적역사서에 포함되지 않았었고, 앗수르(이후 바벨론) 시대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전개된 정황이 히스기야, 므낫세, 요시야 시대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때로는 무리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의견이라는 신선함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해박함에 놀라게 되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사기 17-18장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그 부분만을 번역해서 올립니다. 참고로, http://www.arts.ualberta.ca/JHS/reviews/review164.htm 에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Waiting for Josiah: The Judges by. Philippe Guillanme (pp. 129-43 번역: 양지웅)
제 4 장
요시야의 위대한 이스라엘, 단 자손: 사사기 17-18장
사사기 3-8장에 나오는 구원자들과 개요가 말하는 사사들(삿 2:11-19), 그리고 사사기 10-12장에 나오는 사사들 다음으로, 사사기서는 비-영웅적 인물묘사를 보여주는데 열중하는 것 같다.
입다와 삼손(삿 10-16장)은 어느 정도 구원자와 사사의 성격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내러티브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입다는 자신의 무남독녀를 죽이게 되며(삿 11:34) 삼손은 자살하고 만다(삿 16:30).
사사기 17장에서, 미가의 어머니는 도난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데, 그 도둑은 다름 아닌 미가 자신으로, 그는 후에 그의 모친의 저주로 겁을 먹고 훔친 은을 돌려주게 된다. 어머니는 은 일부를 은장색에게 주어 우상을 부어 만들게 한다.
사사기 18장은 어떻게 미가가 그 우상(과 그것을 섬기도록 고용했던 레위인)을 단 자손에게 빼앗기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단 자손은 삼손의 땅에서부터 요단강의 발원지인 단이라는 성읍으로 이주하는 중이었다.
사사기 19-21장엔, 다른 레위인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경우에서와 같이 익명으로 나타나며, 베냐민 사람들이 보여준 외국인 혐오의 피해자가 되어 그의 첩이 죽임을 당한다는 추악한 사건을 경험한다. 이러한 레위인들과 친-왕적 반복어구(삿 17:6; 18:1; 19:1; 21:25)가 나오는 것은 별문제로 놓고, 사사기 17-18장과 사사기 19-21장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베냐민 지파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차후에 고려하고(제 6장에서), 지금은 사사기 17-18장을 중심으로 단 자손에 집중하겠다(입다와 삼손 내러티브에 대해서는 제 5장을 보라).
사사기 17-18장에 대해, 베커(Becker)는 단 지방의 제의를 비난하는 맥락에서 포로기나 포로후기 초반의 내러티브로 보았다; 이는 열왕기상 12장에서 여로보암이 단에 황금 ‘송아지들’을 둔 일을 비난했던 것과 같다. 여기에서, 비난은 단 제의의 불법성이 여로보암 이전 시기로 앞당겨지면서 더 거세진다: [129/130] 그곳은 단 자손이 단 성읍을 차지하면서부터 애초에 불법적인 곳이 되는 셈이다.
베커가 제시하는 포로기-포로후기 초반이라는 연대설정은 주로 ‘은장색’(ףרוצ, 삿 17:4)이라는 단어에서 기초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보다 오래된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사기 17-18장을 숙명적인 기원전 586년 이후로 멀리 보내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논증은 확실히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베커는 형상금지규정은 포로기 이전에는 그렇게 엄중한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장색(ףרוצ)이 단지 느 3:8,32(‘금장색’)과 잠 25:4(‘장색’)에서만 나온다 하더라도, 동사형(ףרצ)으로는 우상을 거부하는 논쟁구절에서도(사 40:19; 41:7; 46:6; 렘 10:9, 14; 51:17)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른 연대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혹자는 어떻게 한 개의 단어만으로 판단 기준을 삼을 수 있을 런지에 대해서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분석 결과를, 본문을 기술했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끄집어 낼 수 있는 정보들과 함께 결합해야할 필요가 있다.
단 자손, 지리적인 문제
단 자손의 이주라는 이야기는 단 지파의 위치에 대해서 서로 모순되는 성서 본문들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여호수아 15-19장과 사사기 1장 27-34절에 의하면, 단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데, 최북단에 위치한 이스라엘 그룹으로, 단 자손은 단 성읍의 거주자인 듯하다.(창 30, 49장과 신 33장은 지리적인 면이 아니라 계보적인 측면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논증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본문상의 다른 그룹들은(수 19:41-46; 삿 13-16) 단 자손이 예루살렘 서쪽인 소렉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수 19:47//삿 1:35 그리고 삿 17-18장은 이러한 모순을 단 자손이 소렉에서 단으로 이동했다는 보도로 설명하고 있다.
사사기 1장 34-35절: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단 자손
사사기 1장이 단과 관련한 본문들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은, (34절의 단이 아셀과 납달리 다음에 있는 것처럼) 다른 모든 지파들 후에 단에 관해서 언급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첫 번째 그룹에 해당한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35-36절)에서 단이 소렉 지역으로 물러나 있음을 가정함으로써, 단 자손인 삼손의 시대(삿 13-16장)와 삿 17-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렉에서 단으로의 이주를 예견하고 있다. 사사기 1장 34절과 35-36절 사이에 잠깐의 쉼(휴지休止)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34절은 므낫세 왕 시대에 저지대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본문에 해당한다(제 2장을 보라). 그러나 35-36절은 후대의 것임에 틀림없는데, [130/131] 가장 이른 시기라 하더라도, 삼손과 이주 내러티브들이 만들어졌던 편집 단계(삿 13-18장)에 해당한다.
므낫세 시대의 사사기 1장에서는, 단 자손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이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 자손은 최북단의 이스라엘 그룹으로, 아셀과 납달리가 가나안 사람과 섞여서 정착했던 것과는 달리, 평지(개역개정 ‘낮은 지대’)의 도시들을 성공적으로 정복하지 못했다고 한다(삿 1:31-33):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니’(삿 1:34). 사사기 1장 27-34절에 이어서 북쪽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볼 때, 단 자손이 정착하지 못했던 평지는 요단 계곡 상부에 위치한 성읍 단 주변 지역임에 틀림없다(삿 18:7, 14, 27, 29). (삿 18:29에서 말하는 바대로, 단 지파에 의해서 정복되기 전에 단은 라이스로 불려졌을까? 라이스는 이집트 저주문서에서 하솔과 벧-세메스 다음으로 나온다(G. Posener 1940). 라이스는 또한 마리에서 주석을 납품하는 곳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는 투트모세 3세의 목록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세슨(J. M. Sasson 1986)은 라이스를 알레포 지역으로 잡아서 단과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שׁיל는 삿 18장에서 יתיא אל의 축약형인 תיל(존재하지 않는다)를 깔고 있는 아람어적 언어유희로서 볼 수도 있다. 수 19:47은 언어유희를 번역하면서, 라이스를 레셈(םשׁל)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םשׁ אל(이름이 없다)의 축약형이다.) 그러므로 단 자손은 성읍 단을 둘러 있는 지역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단 자손의 적으로 (삿 1:27-33에 나온 것과는 달리) 가나안 사람 대신에 아모리 사람을 지명하면서, 사사기 1장 34절은 요단의 상부 계곡을 이즈르엘과 샤론 평야로부터 확실하게 구별 짓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고고학이 서서히 발견해내고 있는, 이름하여 시리아의 문화 영역이 위-벧세다뿐만아니라 하솔까지 남하했다는 오랫동안 잊혀진 진실을 드러낸 셈이다. 이러한 분명한 이유로 인해서, 사사기 1장은 성읍 단의 주인을 ‘가나안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스라엘과 동떨어진 위치에 놓여있다. 모든 관점에서 볼 때, 단은 사마리아보다 다메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모리 사람’이라는 언급은 34절의 단 자손이 상부 갈릴리의 고지대와 헬몬 산의 경사지에 살고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131/132]
사사기 1장 35-36절은 완전히 전혀 다른 관점으로 시작한다. 34절에서 단 자손이 몹시 탐냈던 성읍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는 것처럼, 아모리 사람은 헤레스 산, 아얄론과 사알빔에 살고 있는 것으로 말함으로써(삿 1:35a), 단 자손은 셰펠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지에 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벧-세메스는 헤레스 산, 즉 ‘더러운 언덕’으로 불렸는데, 이는 납달리의 다른 벧-세메스와 혼동을 피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헤레스 산은 또한 기원전 7세기의 텔 엘-루멜레(er-Rumēle, 전통적으로 벧-세메스의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이다)의 모습과 잘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기원전 701년에 파괴된 이후, 텔은 부분적으로 거주되어 670년 어간까지 상당 기간 버려져왔기 때문이다. 아모리 사람들을 단 자손들과 함께 단에서부터 예루살렘 서쪽까지 이동시키면서, 사사기 17-18장은 어떻게 단 자손이 단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사실 이 단은 이전까지만 해도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넘볼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
뜻밖에, 단 자손의 이주이야기는 사사기 1장 후반부가 여러 단계를 거쳐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지리적인 이동에 추가적으로, 35b절은 ‘요셉의 가문’이 등장하는데, 최후엔 아모리 사람들을 정복하게 된다. [132/133] 이 요셉 가문이 벧엘 정복의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에(삿 1:22-26), 우리는 사사기 1장 22-26절과 35b절 모두가 같은 편집 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벧엘 정복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제 6장에서 다룰 것인데, 페르시아 시대로 연대 설정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기 17-18장 역시 페르시아 시대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보다 이른 시기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단서가 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니에만(Niemann)의 거꾸로 된 이주
마이클 니에만(Michael Niemann)은 최근에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바 있는데(1999년), 자신이 1985년에 내놓았던 논문과 비교하면서, 단 자손의 이주연대를 기원전 1200-1160년에서부터 기원전 735년까지로 이르게 잡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가설에 따르자면, 단 자손은 단 성읍에서부터 이동하여 기럇여아림 근처인 마하네 단(Mahaneh-dan)에 진을 쳐서, 기원전 733년 북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디글랏빌레셀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히스기야는 이들 단 자손 피난민들을 소라와 에스다올에 정착시켰다. 그들은 삼손이라는 지역 민간설화를 자신들만의 전승으로 통합했고, 단이라는 곳을 향해 나아가는 출애굽 내러티브를 만들었으니, 이는 곧 최근에 그들이 소렉 골짜기에 도착한 일에 대하여 자신의 본래 고향으로 ‘귀환’했다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의 선조가 그 지역의 토착민이었기 때문에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이미 부여받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앗수르가 그들을 뒤쫓아 왔고,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포로가 되었다고 제시한다.
이러한 새로운 가설은 매우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명한 왕조 이전 시기의 ‘사사 시대’로 돌아가서 왕조 시대 말기에 일어난 이주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을 찾아내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무장한 군대를 피해서 도망하는 피난민이라는 설정은 문제가 있다. 그러한 현상이 현대에는 잘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고대인들에겐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심지어 외국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전문화된 인도주의적 기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생필품들을 주지 않았다. 확실하게 많은 인구의 이동이라 함은 기껏해야 강제이주, 즉 강제로 사람들을 정든 땅에서 몰아내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은 식물과 동물, 값진 것과 그들 자신을 웅덩이와 굴과 산성 안에 감추었기 때문이다(삿 6:2). (이러한 생존기술은 고고학적 발굴로 여러 군데가 알려졌다: 쿰란이 그 중에 하나이다.) [133/134] 고대 오리엔트에서 대규모의 이주는 그럴듯하지 않은데, 비록 성서 연구 분야에서는 상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그 유명한 바다 민족의 이주라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그것은 결국엔 문학적 창작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일단의 출애굽에 대응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헷 제국 말미에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것과 관련해서 제시된 의심스러운 근거도 전혀 확실치 않다.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도적떼의 급습 때문에 우가릿에서와 같이 전체 인구가 도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가릿에서 발굴을 해보니, 몇몇의 거주민들이 자신들의 귀중품을 땅 밑에 감추어두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했다 하더라도, 가능한 빨리 되돌아오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60개의 화살촉의 발견은 그 도시가 단지 버려진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전투가 발생했던 것이다. 약간의 해골만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사상자의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된 채, 포로가 된 죄수들이 전리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철기 시대로 돌아가 보면, 앗수르에 의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는데, 여기에서 보면 주민들은 탈출하지도 못하고 단지 꼼짝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뿐이었다.
만약 니에만의 주장처럼 단 자손의 이동 연대가 그럴듯하다면, 단 성읍의 거주민들이 앗수르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도망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니에만의 시나리오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거꾸로 된 이주를 바로 잡아보기
사사기 17-18장의 역사적 배경으로 기원전 733년에 앗수르가 단을 정복한 어간으로 잡아보는 것은 주민들의 이동 방향을 거꾸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단 자손의 이주를 보다 큰 인구이동과 함께 고려해서 정반대의 방향, 즉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북쪽으로, 본문이 지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43/135] 기원전 701년에 산헤립이 저질렀던 셰펠라 거주민들에 대한 파괴와 강제이주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사기 17-18장을 단 자손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유대 혹은 블레셋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합당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는 외부인이 말하고 있다: ‘영웅’에 대한 미화는 이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사사기 18장은 정복에 반대하는 내러티브로 읽혀져 왔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단 자손은 그 어떤 위험도 마주치지 않는데, 미가의 집에서나 단에서 조차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약탈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행동은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미가라는 이름 자체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것과는 별개로, 사사기 17-18장의 맥락에서 아이러니한 특색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의 정체에 대해서 다소 확실치 못했는데, 그들이 그들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가 야웨와 같은가?”(והיכימ 혹은 הוהי הכ ימ)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이 유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였을까? [135/136] 그것은 아마도 기원전 701년 이후 앗수르가 그 지역을 다시 재조직했던 것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역은 블레셋에게 넘겨졌기 때문에, 유다가 다시 다스릴 수 있었던 시기는 므낫세나 요시야 통치 아래에서나 가능했다. 딤나(Timnah)는 산헤립의 연대기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매우 정교한 계획 아래에서 즉시 재건되었고 근처의 에그론(Ekron)과 같은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벧세메스는, 오늘의 텔 엘-루멜레(er-Rumēle)로 여겨지는 곳으로, 기원전 701년에 파괴되었다가 기원전 670년에 와서는 완전히 버려졌는데, 이는 벧세메스의 두 작은 위성도시인 소라와 에스다올이 살아남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앗수르의 도시화와 중앙화 정책이 셰펠라에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구가 강제이주된 것은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제이주자들 모두가 머나 먼 지역으로 보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마일 밖으로 이동해서 딤나와 에그론과 같은 새로운 성읍을 건설하고 그곳에 남게 되었던 것뿐이다. 반대로 벧세메스와 같은 중형급 성읍은 사라지게 되었다. 도시화에 발을 맞춰, 소라와 에스다올과 같은 촌락들은 살아남아서 성읍 주면의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사사기 18장은 기원전 701년의 사건이나 혹은 유다가 그 지역을 다시 회복했던 것과 관련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쪽의 가설은 서로가 서로를 설명해주는데, 유다가 다시 셰펠라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왜 그렇지 못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무모했던 반역을 비난하기보다, 요시야는, 그 자신이 앗수르의 지배를 무시하면서, 기원전 701년의 안타까웠던 현실을 ‘단 자손’의 자발적인 이주이야기를 통해서 감추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 유다 사람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단이 선택되었던 것일까? 그 당시에 단이 유일하게 성장하는 성읍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은 한 때 이스라엘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최북단의 성읍이었다. 단을 선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북부 경계를 말할 수 있었고 결국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영토가 세워질 수 있었다. 단 자손의 이주를 요약하는 구절은 이후에 여호수아 19장 47절에서 첨가되었고, 이는 사사기에서 단 자손에게 주어졌던 지역으로 묘사된 부분이 상당 수준 초과한 것을 인정해주었다. 만약 여호수아 19장도 요시야 시절의 것이라면, 그것은 유다의 셰펠라 재정복과 확장을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136/137] 이러한 가설은 니에만의 제안보다 본문에 더 가깝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주’라는 명명에 대해서도 좋은 설명이 된다. 사사기 18장은 아픈 과거를 날려버리고 기원전 701년에 잃어버렸던 지역을 회복한다는 구실을 준다. 그러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사사기 17-18장에는 그 이상의 것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구원자 책에 대한 추가된 비난들
구원자 책이 보여주는 두 개의 근본적인 요소는 이것이다: ‘울부짖다’(קעז, 삿 18:22-23에서는 ‘모으다’) 그리고 ‘평온하다’(טקשׁ, 삿 18:7,27)로, 그 어근은 이미 구원자 내러티브에서 다룬바 있다. 여기에서는, 이들 단어들이 구원자 책의 뇌관(핵심사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구원자 책에서의 ‘울부짖음’은, 미가가 우상과 레위인을 탈취한 단 자손을 막아서기 위해서 이웃을 불러 모은 것으로, 22절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음 절에서, 단 자손은 미가에게 왜 사람을 불러 모아가지고 왔는지를 묻는다. 불러 모음 즉 부르짖음이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구원을 불러올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약탈자인 단 자손은 미가에게 겁을 주어서, 미가의 제의 도구들에 더해서, 만약 울부짖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한다(삿 18:25).
구원자들이 이룩해 낸 구원의 혜택을 톡톡히 즐겼던 땅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평온(삿 3:11, 30; 5:31; 8:28)은 이제 라이스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그 거주민들은 평온하며 안전하게(חטבו טקשׁ)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단 자손이 약탈하고 성읍을 불태우기가 너무 쉬웠다.
구원자 책의 기본 원리가 다시 조롱을 받고 말았다: 울부짖는다고 해서 그 어떠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마라. 그러나 비난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구원자에 의해 약속된 완전한 평온조차도 새빨간 거짓이고, 그것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된 안전임이 드러나 결국 철저한 파괴로 끝이 날 것이다.
모범이 된 단 자손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구원자 책이 말하는 평온에 대한 이러한 맹비난을 볼 때, 사사기 18장을 편집했던 자들의 군국주의적 사고를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야웨를 신뢰한다고 해서 심각한 군사적인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고 경고한다.
만약 삿 18:7, 22-23, 27이, 3장에서 다룬 바와 같이 개요(삿 2:11-19), 이름 없는 예언자(삿 6:7-10) 그리고 야웨와의 거래 사건(삿 10:6-16)까지, 이들 모두가 요시야 시대로 돌려지는 본문의 방식과 같이 구원자 책에 대해서 논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사사기 17-18장 역시 사사기서의 요시야 판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사기 18장의 군국주의적 사고는 요시야시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136/137] 정말로, 요시야를 따라서 이후의 왕들은 이집트와 바벨론이 왕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의 군사적 행보는 다소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기껏해야 예루살렘 성벽 뒤로 자신들을 감추었을 뿐이었고, 결국 별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요시야 자신 만이 국제정세에서 이익을 챙겼을 뿐이었으니, 이 시기는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기에 조약한 전술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단지 잠시 미루었을 뿐이었다.
만약 요시야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이상적인 이스라엘을 고안한 것이라면, 그는 또한 단 정복 이야기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사실, 사사기 18장은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한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그 장의 나머지 절반은 미가의 신상, 미가 자신이 훔친 은으로 만들어진 신상 절도와 미가의 레위인 납치, 그리고 단 제의의 기원이라는 신랄한 풍자를 보여준다. 실제로 성읍을 정복했다고 보고하는 사사기 18장 27절은 별문제로 두고, 17-18장의 대부분은(모두 합하여 44절이나 된다) 미가의 신상의 기원과 그것이 어떻게 단에서 마무리되었는가를 말하는 희비극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의 목적이 단에서 자행되고 있는 제의의 불법성을 입증하려는 것에 있음은 자명하다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단 자손은 이방신 혹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때문에 정죄당하지 않았다. 사실, 형상(우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것이 레위인이 섬겼던 신이었다고도 할 수 없다. 전형적으로 신명기적 표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내러티브는 요시야시기에 들어맞는다. 혹자는 열왕기하 22-23장에서 요시야가 자신의 확장욕에 종교라는 구실을 붙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즉 그 자신을 야웨의 의로운 종으로 만들어서 제의 정화에 열심을 내는 모양새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았으니, 적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모호한 ‘에브라임 산지’(삿 17:1, 8; 18:2, 13)에서, 미가의 어머니의 은신처에서, 우상 제작자와 그 우상숭배 아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이야기의 진정한 악당인데, 이들은 또한 가장 약한 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단 자손은, 비록 그들의 행동이 전혀 영웅적이지 않고 또한 단에 미가의 신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설화자는 그들의 입에 놀라운 말을 집어넣음으로, 레위인이 미가를 버리고 그들을 좇아 단까지 갔다고 말한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삿 18:19). 이러한 질문으로, 단 자손 자신들은 제의 중앙화라는 요시야 프로그램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더 나아가, 단 자손은 본보기 삼을 만한 정복자들이었으니, 정탐꾼의 보고는 열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군대는 즉각 보내졌으니, [138/139] 이는 에스골 골짜기에서부터 돌아온 갈렙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다른 정탐꾼의 보고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준다(민 13-14장).
기럇여아림에 있는 단 자손의 주둔지, 마하네 단(ןד־הנחמ)은 유다 내에 있는데(삿 18:12), 이는 내러티브가 요시야에 의한 베냐민 합병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용사 600명으로 구성된 단일 부대(삿 18:11,16)는 출애굽 동안 이스라엘에서 1000개의 부대와 비견되는데(출 12:37), 즉 그만큼 쉬운 정복을 예고한다. 요시야는 앗수르 속주들을 아무런 문제없이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모든 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사기 18장의 본보기적인 성격은 단 자손이 미가의 우상을 단에 세우는 것에서 멈춘다. 이러한 반대 사례는 요시야로 하여금 종교적 개혁운동으로서 자신의 정복을 정당화하게 했다.
그러므로 이제 단 자손은, 비록 불완전했지만, 요시야 프로그램의 선구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이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혹은 그 근처에서부터 단까지 곧장, 그들은 길을 가면서 불법적인 제의 중심지를 약탈했으니, 이는 그들을 정결케하기 위함이며 용사들의 주머니엔 상급으로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훌륭한 장광설을 듣고 군대는 북부의 부유하고 무방비한 도시를 약탈하기 위한 원정길에 나선다. 사사기 18장은 반-정복 이야기로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단이 농익은 열매처럼 너무도 쉽게 단 지파의 손에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과해서 단까지 느긋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특별한 기회를 솔로몬의 ‘위대한 이스라엘’로 여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용감한 유대인라면 누구나 따라야할 모범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성소들을 치워 없앨 것인데,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분노를 달래고 왕의 통치를 다시 세울 것이다. 누가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왕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
단 자손이 단을 정복한 것은 다소 복잡한 구절처럼 보이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라이스의 사람들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않았다’(삿 18:7). 그러나 요시야 통치 기간 동안, 시돈이란 나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시돈은 엣살핫돈(기원전 680-669년)에 의해 파괴되었고, 앗수르 속주의 수도인 카르-엣살핫돈으로 교체되었다. 두로는 여전히 그 섬나라에서 남아있었지만, 대륙 지역 모두는 기원전 640년 어간에, 즉 요시야가 예루살렘에 왕이 된 시기에(제 3장을 보라), 카르-엣살핫돈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139/140]
그러므로 요시야 시대에 시돈 사람에게 왕은 없었고, 군대도 없었으니, 그들은 이스라엘과 단과 같이 앗수르 속주 체제 내에서 살았던 것이다. 비록 시돈 사람들이 더 이상 시돈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기술은 7절과 잘 들어맞는다. 무난한 번영과 비교적 평온하다는 것이 기원전 7세기 팔레스틴의 특징이기도 했다. 낯선 표현인 ‘권세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םילכמ־ןיא, 7절)는 아카드어와 아랍어적 어근 klm에서 볼 때, ‘왕이 없었다’(םיכלמ־ןיא)의 변조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일반적으로 권세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었기 때문에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요시야는 앗수르 왕을 묵살하면서, 잘 안 쓰이는 히브리어 mklym을 사용함으로써 앗수르 열왕은 더 이상 왕(mlkym)이 아니라고 말한다. 역시,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의 상황이라기보다는 단이야말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디에도 다스리는 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스가 시돈에서 거리가 멀다(איה־הקוחר ןודיצמ)라고 했는데, 만약 시돈에 군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돈의 도움과 같은) 구원할 자가 없었다(ליצמ־ןיא)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글쎄, 요시야 통치 말기, 카르-엣살핫돈과 팔레스타인 남은 지역에 있었던 앗수르 군대의 주둔지가 완전하게 고갈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대부분의 파견부대는 그 당시에 바벨론과 앗수르에 집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요시야가 기원전 609년(느고의 요시야 처형) 이전에 그 어떠한 반발도 받지 않은 채 베냐민을 합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첫 번째 성공에 힘입어, 요시야는 유다가 단이라는 먼 곳까지 이스라엘을 침략한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은 확신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돈 사람이 사는 것’(םינדצ טפשׁמ)이란 우리가 이미 두로에서 살펴본 것처럼(제 3장), 왕이 없는 정부형태를 기술하는 것이다. 친-왕적인 반복어구(삿 17:6; 18:1)는 이스라엘에서도 역시 같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이스라엘과 시돈의 왕들이 통치정부에 의해서 교체되었기 때문에, 사사들은 아마도 두로도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가 다른 지역에서 한창 바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삿 17:6)
친-왕적 반복어구
그러므로 노트를 따라서(사사기 19-21장에서와 큰 차이가 있는데, 17-18장의 반복어구는 편집자의 첨가로 볼 수 없고 내러티브 단위의 처음과 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어구가 사사기 17-18장의 첫 번째 판본에 있었다고 하겠다. [140/141] 반복어구는 단과 그 밖의 이스라엘 지역들의 취약점을 설명할뿐더러, 미가와 단 자손이 보여주었던 비상식적인 행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왕권의 재확립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반복어구는 왕의 부재를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왕의 자리가 어디에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사사기 17-18장에 대한 요시야적 판본이라는 가설에 기초할 때, 요시야는 자신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다. 자신이 행한 왕적 제의 감독 정책이 결국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 두 장은 논쟁적이라기보다는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벧엘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미 병합되어서 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왕하 23:15). 그 어떠한 숨겨진 논쟁점을 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요시야는 그의 작업의 두 번째 구절인 ‘모든 이스라엘’(לשׁרשׁי־לכ)이 유일한 왕(요시야 자신) 아래에 있어야 함을 옹호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차적 첨가
사사기 17-18장을 요시야 시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이후의 첨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베커는 미가가 훔친 은(ךל ונבישׁא התעו, 17:3bβ)을 말하는 짧은 구절이 이차적인 것이라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미가의 말에만 들어있을 뿐 어머니의 대답에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BHS 편집자는, 본문상의 지지 없이, 그 구절을 2a절 뒤로 옮기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라는 말에서 보듯이 어머니는 미가가 방금 그녀에게 주었던 은을 다시 미가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제안이다.
야곱의 아들로서의 단에 관한 언급들은 요시야 이후의 것으로 볼 필요는 없는데, 그 이유는 단이 열두 부족 체계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의 자료인 드보라의 노래에서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삿 5:17).
미가의 ‘신당’(םיהלא־תיב, 삿 17:5)은 베티로스(baethylos)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벧엘을 반대하는 후대의 논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41/142]
에봇과 드라빔(삿 18:14, 17, 18:20)은 후대의 첨가일 수 있는데, 이들이 이야기 안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사사기 17-18장에서 이차적인 것으로 유력한 것은 마지막 구절로, 즉 그 땅과 실로의 사로잡힘을 뜻하는 게르솜과 관련된 연대기적 언급이다(삿 18:30-31). 이로부터 제 2성전시대에서 서로 다른 제사장 그룹들 간의 알력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때엔 결국 예루살렘이 벧엘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이상 정확한 내용을 알 순 없을 것이다.
사사기 17-18장을 이스라엘 합병에 대한 요시야의 성명서로 읽는 것이 이 장들의 자료 역사를 명료하게 할 것이다. 친-왕적 입장은 당연한 것으로, 요시야가 이스라엘내 앗수르 속주의 통치자를 교체할 채비를 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이주 자체는 만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것이라고는 단 자손이 성읍 단의 거주자였다는 점뿐이었기 때문이다. 셰펠라 이주의 목적지로 단을 선택한 것은, 요시야가 이스라엘 연합왕국을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로 설립하려는 야심에서 나온 것이다. 성읍 단의 새로운 거주자가 단이라고 불린 야곱의 아들의 후손이었다는 점 때문에, 요시야는 단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 영역을 다스릴 수 있는 적자로 여겨질 수 있었으니, 유다 셰펠라와 성읍 단의 거주민들은 같은 혈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셰펠라부터 단까지의 단 자손의 이주가 보여주는 표면적인 특성은 역대기서를 편집했던 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순 없었는데, 그들은 단이 성읍을 지칭하거나(대상 21:2; 대하 16:4; 30:5) 혹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보고 있다(대상 2:2). 흥미로운 것은 역대상 7장에서 (다른 지파와는 달리) 단 지파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기럇여아림, 마노아,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의 후손을 언급하는 본문에 씨족을 지칭하는 모양으로 등장하고 있다(4:2; 대하 11:10). [142/143]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에 속한 갈렙 씨족 내에 나열되고 있으므로(대상 2:53-54), 단 자손의 지역을 예루살렘 서쪽으로 보는 것은 더 이상 고려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사기 17-18장은 사사기서의 첫 번째 부록이 아니라, 요시야 판본의 마지막 부분이었다고 하겠다. 이 시기는 단연코 가장 많은 편집이 이루어졌었다. 우선 므낫세가 사사기 1장과 옷니엘 부분을 구원자 책에 첨가했다. 그런 다음 요시야는 사사기 2장에 자신의 서문을 집어넣었고(뼈대), 사사기 6장엔 이름 없는 예언자의 비판적인 내용을 넣었으며, 끝으로 사사들(10:1-5; 12:8-15)과 단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넣어, 결국 사사기 1장부터 18장까지로 된 사사기서를 만들게 되었다(아직 입다와 삼손 내러티브는 포함되지 않은 상태이다). 요시야의 죽음은 왕성한 문학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오랜 안정과 번영의 시기의 종언을 알렸다. 유다의 마지막 왕들의 재위 기간 동안의 정치 상황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이들 왕들은 꼭두각시로, 이집트와 다음엔 바벨론에 의해 빠르게 임명되고 쫓겨나고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내분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궁정에서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지속해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있다고 해서 사사기 17-18장을 요시야 이후의 연대로 잡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집트에서 바벨론 군대가 패배한 일이 있었는데(기원전 601년),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게 있어서 단까지 포함한 이스라엘 정복에 대한 요시야의 계획을 완성할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사사들이 언급된 이후 17-18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로, 요시야와 예루살렘 파괴 사이의 간극을 간단하게 메우고 있다. 사사기 17-18장의 연대를 기원전 6세기 초반으로 잡는 것도 가능한데, 비록, 편의상 말하자면, ‘제 2 요시야’ 판본이 요시야 통치시기에 보존되었더라도 말이다. 어찌 되었건, 기원전 609년 이후, 유다 문헌은 후기-고전 시대로 들어가게 되는데, 므낫세의 오랜 통치의 원숙미와 요시야 시기의 도취미학이 기원전 586년의 대화재를 야기한 소동으로 이끌고 말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파괴는 유다국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았고, 더구나 사사기서의 문학적 활동이 멈추었음도 뜻하지 않았다. 제 5장은 입다와 삼손 내러티브에 집중할 것인데, 사사기의 다음 편집 단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