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독서] 좋은 책 이야기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2007)]

진실과열정 2007. 9. 9. 13:16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박종국 역 (서울: 육문사, 2007)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참으로 많은 시험을 치러냈던 것 같다. 셀 수 없는 과목에 시험 성적이 매번 좋을 리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청소년 시절에 딱 한 번 100점 맞은 과목이 있었다. 바로 국사였다. 아마 중 3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도 놀랐고 선생님도 놀랐었다. 그 후에 역사 과목은 친밀하게 다가왔고, 내게 있어서 역사란 연대기일 뿐이었다.


몇 번 지나쳐서 읽어보았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게 되었다. 확실히 역사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지금부터 약 50여 년 전에 발표된 책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의 역사가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만큼 간단하고 명료했다. 저자는 역사를 신문쪼가리를 질서 있게 모아두는 것 이상의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일종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며, 과거와 미래를 대화시키는 인간만의 인간됨의 증거인 셈이다(191).


저자의 책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점검할 수 있었다: 문서의 맹목성에서 벗어날 것(30), 문서보다 기록자/사회에 관심을 둘 것(37,68), 역사란 끝없이 주고받는 일종의 경제행위라는 것(46), 영웅주의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사회적 과정으로 바라볼 것(84), 신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역사는 과학이라고 믿을 것(113), 상상력을 가지고 가능한 원인들에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136), 그러므로 신학이나 문학으로 만들지 말고(192) 미래를 향한 일종의 방향성을 제시할 것(203), 그러면서 겸손할 것(233).


역사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역사란 밟고 올라가는 계단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카의 이러한 주장도 시대가 바뀌어버린 21세기엔 구닥다리로 홀대받고 있는 것 같다. 그는 확실히 19세기의 사람이었다(75, 123). 카의 역사철학은 생존하는 정치가와 같다. 그에 의하면, 역사가란 실제적이면서 포용적이고, 진보적이면서 합리적이어야 한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담론화된, 즉 내러티브로서의 역사를 보았다면 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시대를 한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서를 역사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에 대해서 다음의 말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명제임에 분명한 것 같다.

“오늘날까지도 고대사나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매력의 하나는, 그것들이 손닿는 범위 안에서 모든 사실을 처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