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rad E. L'heureux, "Searching for the origins of God"
Conrad E. L'heureux, "Searching for the origins of God," Baruch Halpern and Jon D. Levenson eds., Traditions in Transformation: Turning Points in Biblical Faith (Winona Lake: Eisenbrauns, 1981), 33-57.
1. 이스라엘 야웨신앙의 역사(서술적 접근)
성서기록의 성격: 역사적인 기록물로 보기 어렵다(미국의 추수감사절 이데올로기와 같다). 가능한 접근으로는, 성서의 족보가 창작이며, 사사기에 와서야 역사적인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진정한 이스라엘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해는 이스라엘 이전 시기에 서로 다른 그룹들의 전승들이 융합된 것이다. 한편 성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야웨라는 이름으로 인식되었다고 말한다. 야웨가 다른 것을 흡수한 것인가?
Albrecht Alt(1929): ① J가 창세기에도 야웨를 언급하지만, P와 E의 자료(출 3:13-15; 6:2-3)에서와 같이 모세의 시기에 야웨의 인식이 있었음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결국 야웨가 조상들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자체적인 주장이었다고 해석한다. 결국 모세의 시기에 중요한 종교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한편, 창세기에 따르면, 야웨 신앙 이전의 하나님 이해가 등장하는데, (1) (이름의 언급이 없는) 조상(들)의 하나님(창 26:24; 28:13; 31:5, 29, 42, 53; 32:10; 46:3; 49:25; 50:17; 출 3:6; 15:2; 18:4), (2) (이름을 언급하는) 조상(들)의 하나님(창 31:42; 28:13; 31:53; 49:24; 출 3:6; 4:5)이다. 알트는 비교분석을 통해서(유목생활을 하는 나바티안의 100BC-400AD 사이의 비문), “God of PN”이 익명의 씨족의 제의 설립자라고 분석한다. 새로운 고고학의 발견 → Cross: 조상의 하나님은 익명이 아니라, 성전과 신화에서 등장하는 위대한 신들 중에 하나이다. ② 엘(El)은 특정한 장소와 연결된다: 브엘라해로이(Beer-lahai-roi)의 엘-로이(창 16:13), 브엘세바의 엘-올람(창 21:33), 세겜의 엘-엘로헤-이스라엘(창 33:20), 벧엘의 엘-벧엘(창 31:13; 35:7), 예루살렘의 엘-엘룐(창 14:19,22). 한편 P는 족장시대 전반에 걸쳐서 장소와 상관없이 엘-샫다이를 언급한다. 셈어에서 엘은 지역의 신령(numina)처럼 특정한 지역에서 예배되는 신적존재였다고 본다. 새로운 고고학의 발견(라스 샴라, 1400BC) → 엘은 가나안의 최고신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최고신인 엘이 야웨와 관련되어 사용되어질 때 큰 무리가 없는데, 이 둘은 공통점(창조자, 아버지[CTA 3.5.43; 4.1.5; 4.4.47//신 32:6], 지혜[CTA 10.3.6; 4.4.41; 3.5.38; 4.5.66//사 9:5; 단 7:9], 자비[출 34:6], 영원[Ug 5 2.1//렘 10:10; 시 10:16], 만국의 주관자, 황소이미지, 광야 텐트[오헬 모에드]의 전쟁)이 언급되기 때문이다.1)
야웨 전승: ①, ②이전에 야웨 전승의 존재; (1) 모세 혹은 출애굽 그룹, (2) 비-이스라엘 자료(겐족[출 3], 미디안[출 18:10-12]) → 성서외적인 자료가 없으며, 성서 자체가 다양한 전승들의 결합체이므로 원시 야웨 신앙을 추적하기가 불가능하다. 단지 본래적 야웨의 특성은 엘과 조상들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다가갈 수 없는 존재(출 19:16-25), 질투, 시내산.
세 가지의 결합 혹은 조율: ① Victor Maag: 엘을 약화시키며, 조상들의 하나님과 야웨를 결합시킴, 즉 출애굽 이전에는 일부의 지파들에 경험된 조상들의 하나님과 야웨와의 연결이 출애굽 경험으로 제한되다가, 가나안에서의 지파의 결집시에 야웨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흡수함(왕정시에 엘에 대한 예루살렘의 종교적 전승이 결합되었다); ② Eissfeldt: 엘의 강조, 엘 제의가 조상들의 하나님과 교체함(수 24:14-15; 창 35:1-7), 점차적으로 엘제의가 보다 오래된 야웨제의로 이해되어짐 ③ Cross: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조상들은 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예배함, 야웨는 처음부터 엘로 여겨졌던 것뿐이다(야웨의 이름은 엘제의에서 사용되어진 제의적 이름의 일부이다). 그러다가 야웨가 엘에서 떨어졌다. 그러므로 출 3:14의 ‘아쉐르 에흐예 아쉐르’는 ‘만군의 창조자 엘(일 두 야위 쩨바옷)’에 대한 반응이다. 엘과 조상들의 하나님을 예배했던 이들은 사사 시대에 야웨를 부족 연맹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보다 오래된 자료들이 있다: 출 15장의 바다의 노래는 폭풍신(바알-하닷)과 연결되고, 야(Yah)라는 신명은 2400BC에 발견되기도 한다(에블라).
2. 신학적 관계(규범적 관점)
성서의 독특성과 이로 인해서 성서의 하나님의 독특성; 성서는 하나님을 한분이며, 자연의 주기(신화)가 아닌 역사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Cross는 신화적 이미지는 역사적 사건을 위한 표현이었다고 말하며(바다의 노래), 그러므로 신화와 역사의 이분법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또한 선택된 백성들)는 성서의 독특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는 또한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의 독특성과 맥을 같이한다.
(1) 원시적 계시: 플라톤이 오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 성서의 독보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카톨릭 선교사가 이방인들에게서 성서진리와 유사점을 발견했다면, 계시 밖에서 진리가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원시적 계시(Uroffenbarung)로, 아담과 이브에게서부터 하나님 자신이 계시되었다고 본다(초자연적인 계시, W. Schmidt). 이스라엘 종교사 연구에 있어서, 가나안 엘이 성서의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우가릿 문헌해석에 의해 제기된다(G. B. Roggia, U. Oldenburg).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바로 원시적 계시로 접근하며(하나님은 성서이전에 엘로 자신을 나타냈는데, 이후에 사람들은 엘을 신화적으로 오해했다가 족장에 의해서 비밀이 전수되고, 모세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 즉 야웨가 계시된 것이다), 성서의 독특성이 보장된다고 본다. 그러나 아담부터 내려왔다는 주장은 인류의 종교적 성격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모세를 읽었다는 증거가 없듯이, 역사적 증거들이 전무하다.
(2) 발전적 접근: 성서시대에 진리는 자신의 선택된 사람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계시된다(존 크리소스톰). 이것은 신약이 구약을 폐기(supersede)한다는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구약에 있어서는 정복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해준다(제 2이사야도 같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이해했고, 가나안의 신이라는 개념도 없이 그냥 엘로 불렀으니, 이를 신적 겸손(condescension)으로, 사람들의 입장에서 눈높이를 맞춘 신의 행동으로 본다. 역사적인 방법론을 추구하는 견해로(보수적으로 볼 때), 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Albright). 그러나 진보적으로 볼 때, 성서의 상이한 점들은 다양한 신학의 반영이며(Gerhard von Rad), 단순한 발전이 아니다(T. L. Thompson 1974). 이러한 견해들은, 고대근동보다 구약이 우월하고, 구약보다 신약이 우월하며,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로, 반-셈족주의와 같은 쇼비니즘이 될 수도 있다.
(3) 성서 전승의 상대화(relativization): 우월주의나 어떠한 독특성이 없이도 핵심적 신앙을 확언하는 것이 가능하다(C. F. Smith).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는 과정과 같다: 이상화-한계의 발견-극복하고 상대화하면서 받아들임. 계시는 종교적인 통찰력을 포함하는 초월과의 조우(encounter with transcendence)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은혜이고, 선물이며, 성서는 그 자체가 객관적 계시의 종류가 아닌 신앙이라는 공동체로서의 권위가 있는 신앙의 산물이다. 야웨의 이름조차도 비-이스라엘 자료에 등장한다. 성서의 독특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신앙과 동시대인들과의 연속성을 보아야 한다(보편성). 실천적으로 자연과 여성의 문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심지어 다신론적 관점까지도 포용한다.
(4) 무종교적 접근: 신학이라는 명칭 자체가 논쟁거리가 되는 부류;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다면, 그들이 실제로 생각했던 존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독특성이 인간의 본질/사회 자체에도 독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자기이해(계급정당화 이데올로기의 와해를 위한 실제적인 움직임!)의 표현이다(Gottwald 1999:667-709).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서는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성서의 주장을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게 된다.
1) 사실 ‘엘’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충분히 신적인 인식이 가능했다(그래서 시간의 역사로 본다면, 엘[로힘]이 살아남았다). 그런데 왜 야웨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쳤을까? 엘로도 부족했던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신이면서도 동시에 ‘인간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인격의 부여!